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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대표가 파격? 사실 국민의힘은 '혁신정당'이었다
되돌아보면 대한민국 정치혁명은 보수정당에서 시작했다.
입력 : 2021-06-14 오후 3:15:52
제1야당 국민의힘에 국회의원 경험이 없는 ‘0선 중진’ 30대 당대표가 탄생했다.
 
보수정당의 파격에 ‘이준석 효과’가 우리 정치권에 과연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기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듯하다. 그런데 사실 국민의힘 및 그 모체(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등 보수정당의 파격적인 선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 민주정의당(민정당)
 
민정당은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창당해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 시기 집권여당으로 자리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열기를 더해가자,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세력 석방’, ‘국민 기본권 신장’ 등의 내용이 담긴 6.29 선언을 발표했다.
 
집권여당 대통령 후보가 당총재이자 현직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초유의 사태였다. 당시 노태우는 청와대가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벼랑끝 전술'을 펼쳤고,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선언 다음 날 특별담화에서 수용의 뜻을 밝혔다.
 
이를 계기로 노태우는 전두환과는 다른 이미지를 구축했고 결과적으로 대선 승리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일부 정치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는 노태우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닌 전두환과의 사전 조율을 마친 일종의 ‘정치적 쇼’였다는 주장도 있다.
 
2. 민주자유당(민자당), 신한국당
 
1988년 13대 총선에서 집권여당 민정당은 125석을 차지했다. 제1당은 유지했지만, 헌정사상 최초로 집권여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해 여소야대 국면에 돌입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민정당은 정계개편을 시도했고,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민정당(노태우)과 야당인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 합당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하게 됐다. 평화민주당(김대중)만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았다.
 
당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3당 합당으로 평민당의 지역기반인 호남은 철저히 고립돼 지역차별이 심화됐다. 또 보수 우위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수십년간 이어지게 됐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고, YS는 민정계 군 출신 인사들은 밀어내고 대신 신세대 정치인(홍준표, 김무성, 이재오, 김문수) 들을 대거 등용해 민자당의 보수색채를 상당수 덜어낸다.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한다.
 
3.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
 
IMF 등으로 YS는 레임덕에 빠졌고,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조순, 이기택)이 합당해 한나라당이 탄생했다. 한나라당은 비록 15대(김대중)와 16대(노무현) 대선은 패배했지만,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둬 존재감을 과시했고, 17대(이명박), 18대(박근혜) 대선 승리를 이끄는 등 보수정당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긴 역사만큼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다. 우선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 소위 '차떼기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은행을 통한 불법 정치자금 수수가 어려워지자, 아예 트럭으로 현금을 받은 사건이다.
 
통상 당 해체를 논의해야할 거대한 사건이지만, 한나라당은 반성을 한다며 ‘여의도 천막당사’ 생활을 자처했다. 이후 ‘오세훈법’으로 불리는 정치자금법 도입에 앞장서 차떼기 당 이미지 탈피에 노력했다.
 
이밖에 한나라당과 그 계열 정당(새누리당, 자유한국당)은 대한민국 최초 귀화인 출신 국회의원 이자스민을 배출했고, 탈북자 최초 국회의원 조명철, 탈북민 최초 지역구 국회의원 태영호, 헌정사상 최초 여자 대통령 박근혜 등을 탄생시켰다.
 
진보를 자처하지만 사실 중도보수 성향이 강한 민주당 계열 정치세력들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파격들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번 국민의힘 '30대 대표' 선출 역시 대선 등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역대 보수정당이 항상 감행해온 소위 '파격'의 하나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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