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하면 정치계에서 잔뼈가 굵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한마디했다. 오 시장은 며칠 전 서울도시기본계획 2040을 설명하다가 대선 주자들에게 ‘무리수 공약’이 있다고 지적했다. 무리수 공약으로 지목된 공약은 용적률 500%, 일반주거지역 4종 신설이다.
오 시장은 “이런 공약들은 도시 행정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무리스러운, 선거 국면이니까 용인되는 제안들이라고 판단된다”며 “선거가 끝나고 나면 어떻게 현실적으로 서울시 입장에서 담아낼 것인지 합리적인 선에서 조정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당시 발언했다.
한 쪽에서 용적률 500%를 얘기하자 다른 쪽에서 700%를 얘기한다. 이러다간 다음이나 그 다음 대선 때는 1000%를 돌파해도 이상하지 않다. 4종 주거지역으로 안 되면 5종 주거지역도 얘기할 수 있다. 용적률·용도지역이 장난인가. 정말 이러다가 바벨탑이라도 올라가야 할 판이다.
기존 용적률 250%를 적용하던 지역에 500%를 적용하면 공급 가능가구가 2배 증가한다. 특히, 재건축 단지의 경우 공급 가능한 가구가 대폭 늘기 때문에 보다 사업성이 높아져 재건축이 용이해진다. 갖은 규제 완화에도 수 년째 표류하던 단지들의 경우 사업 추진에 탄력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용적률 500%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이다. 용적률을 한 번 올리면 되돌릴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현재 도시계획에서 설정한 250~300%의 용적률은 도시기반시설이 감당 가능한 마지노선이다. 이번에야 500%로 일시적 위기를 넘긴다 하더라도, 다음엔 더 많은 용적률로 해결할텐가.
용적률을 올리면 동 간 거리가 좁아지고 사생활 보호와 일조권 침해도 뒤따른다. 교통, 상하수도, 학교, 병원 등 기반시설 부족 문제도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용적률을 올린 건물이 노후화되는 미래엔 슬럼화도 피할 수 없다.
이번 대선은 유독 후보 개개인에 대한 호불호만 남고, 실제 유권자를 위한 공약은 사라졌다. 모든 관심이 후보자에게만 쏠리면서 가장 핵심이 돼야 할 공약에 대해서는 마치 출근길 유세에서 구호를 외치듯 취약계층을 신경쓴다는 외형만 갖추고 있다.
청년 공약이 대표적이다. 청년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고 갈라치기해 이득을 보려할 뿐 실제 청년들의 현실에 대해 고민과 통찰을 갖고 있는 후보를 찾기 힘들다. 청년들은 비정규직에 가장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는데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얘기하고, 당장 깡통주택 사기를 당하고 집주인의 횡포에 시달리는데 싼 값에 집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식이다.
전국 청년단체들이 대선후보들의 청년 정책을 평가한 결과, 대다수의 후보가 70점을 갓 넘기거나 밑도는 성적표를 받았다. 후보들의 공약이 발언만 그럴싸할 뿐 구체적이지 못하거나 적극적인 실행계획이 부족하다는 평이다. ‘청년없는 청년 대선’이란 말이 더 설득력있게 들리는 이유다.
주거 관련 약자인 세입자들을 위한 공약도 부실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주거시민단체들은 대선후보들의 주거·부동산 공약을 두고 전반적으로 주택 공급에 치우쳐 서로 정책간 차이를 알 수 없다고 평했다. 주거 안정, 세입자 권리 보호, 부동산 불평등 완화, 주거복지 강화 방안은 뒷전으로 밀렸다.
유력 후보들은 임기 동안 수도권에 수백만 호를 짓겠다고 큰 소리로 얘기한다. 다 지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그 양은 적절한지, 그렇게 지으면 누가 그 집에 산다는 건지, 내 집 마련이 진짜 되는 건지 알 수 없다. 여러모로 무리수다. 수도권에 그 많은 집이 늘면 지역균형발전은 어느 대통령이 챙길까.
이번 대선도 무리수 공약을 빼면 남는 공약이 몇 없다. 무리수 공약으로 유권자를 현혹하고 당장 시끄러운 여론을 무마해 표를 얻는 일만 중요하다. 적어도 투표를 앞두고 공보물을 들여다보는 유권자들에게 '대통령이 되면 이런 변화가 있겠구나' 정도의 그림을 제시해줘야 한다. 무리수 공약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