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2년 12월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는 다음 해 곧바로 짐을 싸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40년간의 파란 많은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막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며 영국행 비행기에 그가 오르자 지지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의 정계은퇴는 아쉬웠지만 ‘졌잘싸‘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시에도 DJ가 정계은퇴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94년 귀국해서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기까지 정치적인 발언이나 정치활동을 일체하지 않았다. 95년 지방선거가 치러지자 YS를 비판하면서 정치활동을 재개한 김 전 대통령은 97년 대선에 다시 출마해서 마침내 15대 대통령에 취임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정계은퇴 번복에 대해 논란이 빚어졌지만 대선출마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0.73% 차이로 패배한 것에 대해 민주당지지자들은 '졌잘싸(졌지만 잘싸웠다)'라며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 졌잘싸에는 대선패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사실상 이긴 선거라거나 이길 수 있는 선거였는데 졌다는 대선불복의 감정이 그대로 녹아있어 강성지지층들을 묶어내는 기호로도 작용하고 있다. 그 구호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지키자’거나 ‘이 후보를 차기 대선 때까지 지켜내자’며 두 사람에 대한 사법리스크를 막아보겠는 불순한 의도로 20여일 만에 ‘검수완박’ 법안을 강행처리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6.1 지방선거과정도 이런 졌잘싸 분위기가 민주당내의 주류였다. 대선패배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선패배의 무한책임을 져야 할 이재명 후보가 정치적 연고가 없는 인천 계양을 보선에 출마하는 무리수를 강행한 것이나 이 후보 다음의 책임을 통감하고 당대표직에서 물러난 송영길 전 대표가 인천을 떠나 뜬금없이 서울시장 출마에 나선 것은 졌잘싸의 연장선상에 있다. 공천과정에서 송 전 대표가 ’컷오프’되자 이 후보는 비대위원 전원에게 전화를 걸어 송 전 대표를 구제하는 구원투수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졌잘싸 앞에선 대선패배의 원인을 분석해서 진솔하게 반성하거나 패배의 책임을 지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잘 싸웠는데 왜 반성하고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가 말이다.
이 후보와 민주당 지도부는 조국사태와 부동산문제 대장동게이트 등 문재인 정부 5년의 실패와 대선후보 본인의 온갖 비리의혹에도 불구하고 0.73%차이로 패배한 것에 대해 ‘이길 뻔 했으니 정말 잘 싸웠다’는 자부심을 갖고 당당한 것 같다.
승자독식구조의 정치판에서 선거에서 지면 끝이다. 대선에서 패배했더라도 당권을 움켜잡으면 다음 대선에 재도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잘하면 문재인 전 대통령처럼 다음 대선에서 성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재명의 보선출마, 8월 전대 당권장악 시나리오를 만든 명분이 됐다.
그러나 이재명의 계양을 출마는 김 전 대통령의 경우에 비교해보더라도 빨라도 너무 빨랐다. 차기 대선 재도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자충수와 다를 바 없는 빠른 복귀였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것 같다. 대선패배의 책임을 무겁게 통감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국민이 부를 때까지 참을 수는 없었을까? 대장동과 백현동, 변호사비 대납의혹 및 법인카드유용 등 자신을 둘러싼 의혹들에 대한 검경의 수사가 진짜로 두려웠던 것일까?
6.1 지방선거는 끝났다. 지방선거는 대선연장전이 아니었음에도 대선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지층을 향해 졌잘싸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대선불복의 기류를 지피면서 아쉬워하는 지지층을 결집한다면 해볼만하다는 생각으로 지방선거에 전력투구한 민주당의 전략은 대선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대선불복전략이 맞다. 민주당의 구호는 졌잘싸가 아니라 어차피 질 선거였으니 잘졌다는 의미의 ‘졌잘졌’으로 수정되어야겠다.
야권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환한다면 “원칙 없는 승리보다는 아름다운 패배가 낫다”고 하지 않던가? 명분과 원칙을 잃어버리고 승리에 집착하기 보다는 차라리 당당한 패배가 국민들을 감동시키고 이기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노 전 대통령을 통해 기억하고 있다.
국가백년대계인 김포공항이전 문제를 뜬금 없이 끄집어내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그가 당선될 뻔한 대선후보였다는 사실을 의심케 한다. 대선 때는 김포공항이 강서구의 자산이라면서 두둔해놓고 느닷없이 인근 인천 보선에 출마해서 소음피해에 시달리는 계양주민 표를 의식, 김포공항 폐쇄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서 지난 대선에서의 국민의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재명의 대선패배는 졌잘졌이다.
대선패배와 지방선거 이후 민주당의 환골탈태와 자기혁신을 기대해본다. 뼈를 깎는 반성과 변화의 노력없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같은 무리수를 통해 강성지지층만 바라본다면 2년 후 총선과 다음 대선도 기대난망이다.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