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변소인 기자] 수마가 할퀴고 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9일 저녁, 24시간 전만해도 버젓이 영업을 하고 있던 전통시장은 아수라장이 돼 소리 없는 비명으로 가득했다. 간밤의 상황을 짐작케 하는 냉장고들은 길거리에 나뒹굴었고, 반짝이던 새 상품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레기봉투에 담겼다. 피해를 크게 입은 서울 전통시장 세 곳의 모습이었다.
동작구 사당동 남성사계시장
9일 동작구 사당동 남성사계시장에 냉장고와 집기들이 버려져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태어나서 그런 비는 처음 봐요. 빗물이 갑자기 들이쳐서 물을 다섯 번이나 먹고 겨우 빠져나왔네요. 그저 '살아있는 게 다행이다' 생각하기로 했어요."
8일 밤 내린 폭우로 가게의 자산을 거의 다 잃어버린 부부는 생존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지난 2005년부터 횟집을 운영해 온 이 부부는 이번과 같은 침수는 처음이라고 전했다. 침수로 냉장고는 물론 수족관까지 모두 망가졌다. 단전으로 수족관에 있던 생선은 물론 200만원어치의 로브스터도 폐사했다.
이 부부의 목표는 열흘 후에 영업을 재개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자금이다. 이 부부는 코로나19로 단체 손님을 못 받게 되면서 영업이 어려워져 7000만원의 빚을 낸 상황이다. 냉장고와 수족관, 생물들을 다시 들여놓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한데 당장 얼마나 빚을 더 낼지 막막하다고 이들은 전했다.
1층보다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한 곱창가게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여전히 바닥에 물이 흥건했고 물이 다른 곳보다 높이 잠겨 밤새 전기까지 나갔다가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겨우 전등을 켤 수 있게 됐다. 중학생인 자녀들과 간밤에 10시간 넘도록 물을 빼냈지만 냉장고 7개, 포스기, 컴퓨터, 냉장고, 심지어 벽걸이형 에어컨까지도 쓸 수 없게 됐다.
9일 동작구 사당동 남성사계시장의 한 상점의 냉장고들이 넘어져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곱창가게를 운영하는 A씨는 "우리는 남들처럼 불도 안 들어와서 암흑 속에서 물을 퍼냈다"며 "뭐라도 보여야 버릴 물건인지 주워 담을 물건인지 구별을 할 텐데 그것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어제 직원 두 명을 해고했다. 당장 인건비가 부담됐다"며 "정수기는 렌털 제품인데 위약금이 무서워서 문의전화도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A씨는 영업재개까지 두 달 정도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남성사계시장은 다른 시장보다 수습이 더뎌 한눈에 봐도 처참한 광경이었지만 상인들은 인상 찌푸릴 시간조차 아끼는 분위기였다. 당장 물에 잠긴 집기들을 꺼내고 닦느라 현실을 자각할 시간도 없이 쫓기고 있었다. 상인들 사이에서는 물이 깊이 차오른 것이 배수관, 펌프를 제대로 작동시키지 않아 발생한 인재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동작구 상도동 성대전통시장
9일 동작구 상도동 성대전통시장에 위치한 한 당구장에 물이 가득 차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길게 빼낸 주황색, 파랑색 혀가 상점입구마다 널브러져 있었다. 지하에 가득 고인 빗물을 빼내는 호스였다. 겉으로 말끔해 보이는 건물도 지하로 내려가면 사정이 달랐다.
성대전통시장 건물 앞에는 무미건조한 얼굴을 한 상인들이 호스를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지하에 가득 찬 물을 빼내고 있는 B씨는 "아침부터 물을 빼냈지만 아직도 천장 근처까지 물이 차있다"며 "오늘 안에 물을 다 빼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실제로 B씨가 운영하는 지하 당구장에 진입하려하자 계단까지 물이 차올라 당구장 간판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빗물은 전기 배선함까지 덮었던 흔적이 있어 위험천만한 광경을 연출했다.
이곳에서는 도시가스 공급도 중단돼 곳곳에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관악구 신사동 관악신사시장
9일 관악구 신사동 관악신사시장의 한 신발가게에서 가족들이 물에 젖은 신발을 닦고 있다. (사진=변소인 기자)
"장화만 팔려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세일해서 팔아야죠. 젖은 신발은 3일 지나면 답도 없어요."
샘플만 1500켤레가 넘는다는 신발가게 사장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24시간 전만하더라도 디스플레이 공간에 곱게 배치됐던 새신들이 흙빗물을 만나 꾀죄죄한 꼴이 됐기 때문이다. 이 가게에서는 가족들이 열심히 젖은 신발을 헹구고 닦고 있었다. 대형 매장을 운영하며 여러 신발을 전시했던 게 오히려 독이 됐다고 C씨는 설명했다. 취재 도중 아비규환인 매장을 찾아온 손님은 급히 장화를 구매했다.
C씨는 "지하에 내려가려면 안전문제로 무조건 장화를 신어야 한다"며 "지금 장화만 팔린다. 장화만"이라고 강조했다. 아직 창고에 있는 물건들을 살피지도 못했다는 C씨는 떠돌아다녔던 신발들을 보며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이곳 시장에서는 어젯밤 비에 잠겼던 신선식품들이 상해 악취를 풍겼다. 온풍기, 다리미, 선풍기 등 각종 전자제품들을 마루에 늘어뜨려 놓고 재작동에 대한 희망을 품는 상인들도 있었다.
피해 시장 상인들은 자신의 피해액을 가늠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빗물을 퍼내고 닦기에 급급했다. 현실에 대한 자각을 뒤로한 채 넋이 나간 얼굴로 눈앞의 일에만 몰두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한편, 중기부에 따르면 10일 오후 6시 기준 전통시장 피해 규모는 서울 20개 시장 400여개 점포, 경기 23개 시장에 140여개 점포, 인천 5개 시장 200여개 점포 등으로 파악됐다.
변소인 기자 bylin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