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정해훈 기자] 미국 주도의 반도체 협의체인 '칩(Chip)4' 참여에 대해 국내 수출 기업 대부분이 찬성하는 것과 달리 전문가들은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는 비중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전문가 과반은 수출 역성장 등 반도체 산업의 위기가 내후년까지 지속할 것으로 예상했다.
5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국내 반도체 전문가 30명을 대상으로 국내 반도체 산업 경기에 대한 인식을 조사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칩4 논의가 국내 반도체 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해 46.7%가 '부정적'('매우 부정적' 16.7%, '다소 부정적' 30%)이라고 응답했다. '긍정적'('매우 긍정적' 3.3%, '다소 긍정적' 33.3%)이란 응답은 36.6%, '큰 영향 없을 것'이란 응답은 16.7%를 차지했다.
박진섭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산업은 엄청난 국제 분업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칩4 대화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면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과의 R&D·공급망 협력 등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한편, 미·중 경쟁 심화와 중국의 반발에 따른 부작용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아직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확연하고, 중국의 필요가 크기 때문에 당장 수출이 타격받을 가능성은 작다"고 덧붙였다.
앞서 대한상의가 지난달 17일 국내 수출 기업 300개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대외 환경 변화에 따른 수출 전망과 정책 과제 조사' 결과에서는 응답 기업의 53.4%가 '칩4'에 '참여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또 41.3%는 '참여는 하되 당장은 보류하는 것이 낫다'고 응답해 참여에 대해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는 견해도 나왔다. 반대로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응답은 5.3%에 그쳤다.
미국의 '반도체와 과학법'의 영향에 대해서는 '긍정적'('매우 긍정적' 3.3%, '다소 긍정적' 46.7%)이란 전망이 50.0%, '부정적'('매우 부정적' 20%, '다소 부정적' 20%)이란 전망은 40.0%로 집계됐다. '큰 영향 없을 것'이란 답변은 10.0%에 불과했다.
정의영 연세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반도체와 과학법'으로 인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미국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될 가능성이 커졌다"며 "가드레일 조항 때문에 중국 투자가 제한받는 등의 부정적 요인도 있지만, 반도체 개발·설계 분야에서 기술적 우위에 있는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도 또한 클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미국의 반도체, 전기차 지원법 대응 업계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전문가 76.7%는 현재 반도체 산업이 처한 상황을 '위기'('위기 상황 초입' 56.7%, '위기 한복판' 20%)로 진단했다. 또 '위기 상황 직전'이란 응답은 20%였고, '위기 상황이 아니다'란 답변은 3.3%로 집계됐다.
현재 상황을 '위기' 또는 '위기 직전'으로 진단한 전문가에게 '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는지'를 물어본 결과 가장 많은 전문가가 '내후년 이후에도 지속될 것'(58.6%)으로 전망했다. 그다음으로 '내년까지'(24.1%), '내년 상반기까지'(13.9%), '올해 말까지'(3.4%) 등의 순이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반도체 공급 과잉, 글로벌 수요 감소, 재고 증가에 따른 가격 하락, 중국의 빠른 기술 추격,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심화 등의 리스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반도체 산업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다"며 "장단기 이슈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이 상당 기간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현재 반도체 산업이 처한 상황이 최근 10년 내 가장 심각한 수준이란 의견도 많았다. 지난 2016년(중국의 메모리 시장 진입), 2019년(미·중 무역 분쟁) 등 최근 10년 내 있었던 국내 반도체 산업의 부진 시기와 비교한 현재 상황에 대해 전문가의 43.4%는 '그때보다 심각한 수준'('매우 심각' 16.7%, '심각' 26.7%)이라고 응답했다. '유사하다'는 답변은 36.6%, '양호하다'는 답변은 20.0%로 조사됐다.
범진욱 서강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과거 반도체 산업의 출렁임이 주로 일시적 대외 환경 악화와 반도체 사이클에 기인했다면, 이번 국면은 언제 끝날지 모를 강대국 간 공급망 경쟁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국의 기술 추격 우려까지 더해진 양상"이라며 "업계의 위기감과 불안감이 어느 때보다 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해 가장 시급한 정책 과제로 △칩4 대응 등 정부의 원활한 외교적 노력(43.3%) △인력 양성(30%) △R&D 지원 확대(13.3%) △투자에 대한 세제·금융 지원 확대(10%) △반도체 소재에 대한 공급망 안정화 지원(3.4%) 등을 꼽았다.
우태희 대한상의 상근부회장은 "전체 수출의 5분의 1을 담당하는 반도체 수출이 감소한 상황에서 지난주 정부가 '수출 경쟁력 강화 전략' 발표를 통해 반도체에 대한 기업 투자와 인력 양성을 약속한 것은 다행"이라면서도 "해외 기술 기업 투자·인수를 위한 특단의 제도 개선과 반도체 경쟁국 사이에서의 적극적이고 세련된 외교 등 반도체 분야 초격차 유지를 위한 보다 근원적 노력이 필요한 시기"라고 주문했다.
정해훈 기자 ewigju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