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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22)과거를 딛고 미래로 향하자!
입력 : 2022-11-15 오전 10:47:52
나는 베트남에 오기 전 해상왕 장보고가 호이안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을 것이란 글귀에 눈이 번쩍 열려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의 역사를 조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지만 만족할만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문화의 젖줄을 강대국에만 한정하여 옛날에는 중국에만 치중하고 지금은 미국과 유럽만 편중하였다. 여타 나라들의 오랑캐로 취급하여 역사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시아의 일원이고 미래의 먹거리도 아시아에서 나올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아시아 알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다. 올해가 '한-베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향하자!”라는 입장으로 미래를 향한 현명한 선택을 하였다. 1992년 수교 당시 양국 간의 교역 규모는 5억 달러 수준에 불과했지만, 2021년에 807억 달러를 달성하여, 29년 만에 무려 161배나 증가하였다. 베트남에서 한류가 인기를 얻고 있음은 900여 년을 교류해온 전통이 두 나라의 역사에 면면히 전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는 넓은 길을 내주지만 그 길을 헤쳐 나가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16세의 꿈 많은 신라 청년 혜초는 큰 깨달음을 얻고자 정든 고향을 뒤로한 채 먼 바다로 나갔다. 혜초가 도착한 곳은 당시 국제적인 항구로 자리 잡았던 광저우였다. 당시 세계적인 무역항 광저우에서 처음 본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도 유독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이곳을 오고가던 서역의 배들이었을 것이다.
 
저 배를 타고 가면 스승 금강지의 나라에서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그의 가슴은 4년간의 중국 유학 생활에도 채워지지 않는 휑한 것이었다. 그의 구법의 열망은 그를 부처의 나라로 이끌었다. 무역선에는 온갖 신비로운 물건 뿐 아니라 여러 군상의 사람이 탓을 것이다. 가는 목적지는 같아도 가슴에 품은 뜻을 달랐다.
 
첫 번째 경유지는 베트남 참파국의 호이안이었다. 그 당시 참파왕국은 동남아시아 무역의 중심국이었다. 8세기 무렵 참파왕국은 찬란한 힌두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무역도시가 그렇듯이 호이안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였다. 작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중국인과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광동인들의 모임 장소이자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사원이 있고, 1593년 지어진 중국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를 연결하기 위해 세운 내원교라는 작은 목조 다리가 있어 지금도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유혹하고 있다.
 
이 다리 한가운데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까우 사원'이 있다. 머리는 인도, 몸통은 베트남, 꼬리는 일본에 둔 아주 큰 ‘꾸’라는 괴물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이 괴물이 한번 움직이면 홍수나 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 꾸를 없애기 위해 꾸의 약점이 있는 이곳에 내원교를 세웠다는 것이다. 원숭이 해에 짓기 시작하여 개의 해에 완공하였다고 다리 한쪽 끝은 원숭이 상이, 다른 한쪽 끝은 개의 상이 있다.
 
호이안은 투본강 상류의 성스러운 땅 ‘미손’을 연결하며 2세기부터 국제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호이안은 참파왕국 때부터 신라의 장보고를 비롯해 중국, 일본, 포르투갈, 프랑스 등 서양국가의 상인들이 빈번히 드나들면서 중계무역항으로 해양실크로드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대 항구도시이다. 
 
호이안과 우리나라의 인연이 기록에 나타난 것은 1687년에 제주도 군영 소속 김태황이 목사 이상전의 진상마를 싣고 사공 등 24명과 더불어 별도포를 출발하여 한양으로 향했다. 추자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동북풍이 심하게 일어, 키가 꺾이고 돛대가 부러져 바람부는 대로 떠내려가다가 30일 만에 안남국 호이안에 도착하였다. 낚시하던 이에게 물을 달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관부로 안내했다.
 
일행은 부근의 무인도에 1년 반 동안 유폐되어 생활하다 안남국의 협조로 중국 배편으로 1688년 8월 7일 호이안을 떠나 중국 닝보를 거쳐 12월 16일 제주도 대정현에 돌아왔다. 일행 중 살아남은 고상영이 역관 이제담에게 구술해 표류기가 남았다.
 
표류기에는 안남국의 호이안과 수도 후에와 그 주변 지역에 관한 흥미진진하고 신비한 따뜻한 남쪽나라의 귀중한 기록이 담겨 있다. 땅이 기름지고 날씨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해 벼는 1년에 3모작을 하고, 누에는 5번이나 쳐서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부하고 인심이 좋다고 풍요로움을 소개했다. 집채만 한 동물 코끼리를 비롯하여 물소, 원숭이, 공작새, 등 처음 보는 진기한 동물도 소개하고 바나나와 야자수 열매, 용과 등 맛있는 과일도 소개했다. 
 
베트남의 최초의 장기 왕조는 리왕조이다. 태조 리꽁우언은 즉위하자 수도는 현재의 하노이로 정하고 ‘용이 승천한다.’는 뜻의 탕롱으로 명명하였다. 대월의 궁중 근위대장이었던 그는 열 살의 어린 황제를 물리치고 제위에 올랐다. 리 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식 행정 제도를 도입해 중앙 집권적 관료체제를 만들었으며 과거제도를 도입하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베트남이 동남아에서는 유일하게 유교문화를 받아들인 나라가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 중 귀화 성씨는 136개 성씨가 있는데 그 중 베트남과 관계가 있는 성씨가 정선 이 씨와 화산 이 씨가 있다. 이 두 성씨는 안남국의 왕자가 우리나라에 도래하여 정착함으로서 얻은 성씨이다.
 
정선 이 씨의 시조는 안남국의 왕자인 이양혼이다. 이 사람의 형이 바로 이양환으로 안남국의 5대 왕인 신종이다. 두 형제가 왕위를 놓고 다투다가 결국 이양혼(리 즈엉 꼰)은 송나라로 망명했고 송나라 문하시중이었던 진 씨의 딸과 결혼하여 살다 다시 송이 금나라의 공격을 받자 전란을 피해 1127년에 고려로 망명하여 경주에 정착했다. 그 6대 손 중 우리가 잘 아는 이의민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고려 의종 때 무신의 난을 일으켰던 정중부의 3인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소금장수 이선이며 어머니는 영일현 옥령사의 종이었다. 그는 키가 8척이나 되는 거인으로 용력이 뛰어났지만 고향에서 못된 짓만 일삼던 건달이었다. 그는 수박희에 뛰어나 경군에 발탁되었고 의종의 눈에 띄어 승진을 거듭하다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중랑장이 되었다. 그는 조위총의 난 때도 공을 세워 상장군까지 승진했다. 그는 자신을 총애한 의종을 손으로 척추를 꺾어 죽였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그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난이 일어난 지 7년 만에 정중부는 2인자 경대승에게 살해되었고 경대승도 5년 만에 병사하면서 이의민은 일약 대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는 14년간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그 후 13세기에 또 다른 베트남인이 우리나라로 피난을 왔다.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리 통 트엉)은 리 왕조의 개국왕인 이태조 이공온의 7대 손이며 안남국 7대 황제 고종(까오 똥)의 동생이었으며 8대 혜종(후에 똥)의 숙부이다. 당시 외척인 쩐 투 도는 후에 똥을 협박하여 7살 밖에 안 된 후에 똥의 딸에게 양위를 하도록 강요했다. 리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며 최초의 여황제인 찌쩌우 호앙을 쩐 투 도가 자신의 조카와 결혼시켜 남편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방식으로 쩐 왕조를 개국하며 역성혁명을 했다. 이렇게 1225년에 리왕조는 멸망하고 쩐왕조가 건국하게 된다.
 
1226년 리왕조를 멸하고 들어선 쩐왕조는 리왕조의 부활이 두려워 대규모 살육이 벌어진다. 이용상은 가족과 하인을 이끌고 바다로 탈출하였다. 아마도 베트남 최초의 보트피플이 되었다. 그 보트피플이 바다를 떠돌다 도착한 곧은 황해도 옹진군이다. 고려는 이들을 난민이라고 안하고 잘 보살폈다. 
 
고려는 매년 팔관회라는 국제적인 페스티발을 펼칠 정도의 국제적인 나라였다. 거기에는 동남아시아. 아랍인, 페르시아, 여진 등이 함께 어울렸다. 이용상이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적들이 마을 사람들을 잡아가는 것을 보고 해적 떼를 물리쳤다. 이것이 고종에게 보고되고 고향을 떠나온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고종은 그들이 정착하여 살게 영주권과 땅을 하사하였다. 베트남 최초의 집단 이민자가 되었다. 그가 고려를 새 터전으로 삼은 지 어언 20년 1253년 몽골이 침입하자 화산성을 쌓고 몽골을 막아내고 고려에 평화를 가져다준 영웅으로 기록된다.
 
베트남과 수교하고 화산이씨(花山李氏) 종친회는 1995년 베트남을 방문했다. 도무어이 당서기장을 비롯한 3부요인이 영접 나왔다. 베트남의 언론들은 다투어 이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했다. 공항에는 ‘망국의 왕자, 8백 년 만에 돌아오다.’라고 쓰인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이들을 환대하고 베트남인과 동등한 법적 대우 및 왕손 인정 등의 호의를 베풀었다. 베트남 정부는 해마다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종친회장을 비롯한 종친회 간부들을 기념식에 초청하여 행사를 진행한다. 
 
베트남 정사 ‘대월사기전서’에 의하면 베트남의 유학자 막딘찌가 원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찾았을 때 고려의 사신도 원나라에 왔다. 원나라의 황제는 두 사신의 글재주를 겨루는 백일장을 즉석에서 개최하고 막딘지의 손을 들어줬다. 우리 측 기록에는 없으니 의문의 일패이다. 이 사람은 베트남과 원나라 두 국가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수재였다. 필담으로 고려 사신과 교류하며 친해졌다.
 
그는 이때 인연으로 고려 사신의 초청으로 고려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그가 고려에 자손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고려에 4개월 머물면서 사신의 소개로 그의 조카딸과 결혼시켰는데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다고 한다. 그의 장남은 아들 8, 달 넷을 얻었고, 차남은 아들 넷을 두었다고 하는데 더 이상 기록은 없다.
 
고려 공민왕 때에는 문익점 선생이 1363년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순제(順帝)의 미움을 받아 3년간 교지로 귀양을 갔었다. 귀양에서 풀려 교지에서 몰래 가지고 온 목화 씨앗이 한민족 복식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목화씨가 베트남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진주 출신 선원 조완벽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가 상선을 타고 베트남에 들른 일이 있다. 그는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베트남에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어느 고관이 베푼 연회에 참석했는데 그 고관이 글을 펼치며 “이수광이 쓴 시인데 아는가?” 명나라에 세 차례 사신으로 다녀온 실학자이자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은 베트남 사신과 교유하며 시를 주고받아 베트남에서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이것이 한류의 원류가 될지도 모른다. 조완벽은 베트남 유생들이 이수광의 시를 애송했다고 돌아와서 보고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평화달리기 41일차인 지난 10일 베트남의 한 마을을 달리고 있다.(사진=조헌정 목사)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최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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