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크게 작게 작게
페이스북 트윗터
(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24)오래된 비명
입력 : 2022-11-21 오후 6:30:05
땀이 범벅된 사람들의 몸에서는 오로라 광채 같은 것이 흐른다. 성스러운 노동을 할 때나 즐거운 놀이를 할 때 몸에서 영롱한 이슬방울 같은 땀이 맺혀지기 시작하면 마치 오랫동안 잠들었던 잠재적인 능력들이 깨어 나와 활동을 시작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스마트폰 속에 깔린 섬세한 전선에 전원이 연결되어 전 세계와 소통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흐르는 땀은 가슴 속에 끊는 무언가를 태우고 흘러내리는 촛농 같은 것이다. 달리면서 흘리는 나의 땀은 전 세계와 소통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
 
깜라인에서 판랑탑참으로 넘어가는 곳은 산맥 사이로 좁은 회랑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랑은 중국의 하서회랑, 폴란드회랑, 아프가니스탄의 와칸회랑 등이 있다. 이 회랑으로 사람도 이동하고 바람도 이동한다. 옛날에는 이 회랑에 산도적들이 지키고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 돈을 뺐었다. 지금은 풍력발전기들이 바람과 마주보며 지나가는 바람을 잡아 전기를 만들어 돈을 번다.
 
현실을 개선하려는 자는 거친 길을 주저 없이 나서느니, 길 없는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베트남의 좁고 번잡한 국도를 달리며 바람과 같이 위태로운 역사를 마주보며 풍력발전기처럼 달리며 자가 발전을 한다.
 
어제는 지나가던 중학생 꼬마 녀석이 사탕수수 주스를 내밀고는 수줍은 듯 달아나더니 오늘은 산타크로스들이 더욱 더 많이 나타났다. 내가 산적 같은 모습으로 달려가니 지레 겁먹고 뇌물을 바치듯이 중년의 남자가 돈 5만동을 내밀며 가더니 청년이 음료수를 바치고 갔고, 이어서 아가씨가 작은 오렌지 한 보따리와 큰 물병 두 개를 바치고 같다.
 
산타크로스는 또 있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친구들이 응원하러 베트남의 이름 없는 어촌마을까지 찾아와주었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아라(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그렇게 찾아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힘이 난다. 공중급유를 받은 전투기처럼 전투력이 살아난다. 친구들은 항상 그리움이 대상이요, 힘의 원천이다.
 
새벽에 스콜이 한 차례 지나가더니 산 아래 무지개가 떴다. 그걸 보는 순간 내 머리 속에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가 떴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 뛰노라/ 내 어렸을 때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니/ 늙어서도 그러하기를/ 아니라면 나를 죽게 하소서!
 
조용히 달리노라면 여러 가지 옛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때 스콜이 지나가면 시원하게 비를 맞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어폰을 끼고 베트남 전통음악을 들으면서 달린다면 그건 교통상황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위험한 일일 것이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아픈 기억이 바람에 죽어가던 불씨 되살아나서 광기를 부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왜 그때 나는 바보 같이 그렇게 하지 못했나?
 
대나무로 만들어진 목관악기가 대나무 숲을 그리워하며 내는 소리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이 가슴에 생채기를 내서 그 위에 굵은소금을 뿌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전통 음악은 야자수 나무 아래 그늘에서 여러 사람이 둘러 모려 들을 때 제 맛이 된다.
 
그래 저 리듬이다! 이방인이 들어도 가슴을 저며 오는 애절한 베트남 전통 음악은 색다르고도 오래전부터 친숙한 리듬이다. 이국적인 향신료를 더한 야릇한 음악으로 다가온다. 이럴 때 반가워해야할지 낯설어해야할지 잠시 나의 달팽이관은 중심을 잃는다. 그러다 헤어진 지 오래된 여인을 만났을 때 잠시 기억의 회로가 바삐 움직이다가 곧바로 눈물을 글썽이며 부둥켜안게 되는 때의 기분을 들게 된다. 그 그립고 아련한 품에 서로 안기고 나면 현실의 불만족쯤이야 금방 잊고 서로의 익숙하던 심장박동 소리에 귀 기울이며 행복감에 깊이 잠겨버리게 될 것이다.
 
베트남은 우리의 노래방 보다 더 가라오케가 많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집집마다 누가 더 성능 좋은 오디오 시설을 가졌는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소리를 크게 하고 노래를 부른다. 우리처럼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것도, 그 전통 악기와 음악이 우리와 닮은 것도 어찌 생각하면 한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비명
 
전쟁도 견뎌냈을 언덕 위에 외로이 선 
참파의 옛 벽돌 탑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나무 잎사귀 
사이에 주렁주렁 달린 열매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퉁소 소리
 
쪽빛 바다에 어울리는 불타는 노을
황금빛 구름 아래 흔들이는 작은 원형 배
파도에 떠밀려드는 오래된 비명들
생채기처럼 도져오는 미망
줄기가 다시 뿌리 되는 반얀나무
프랭기파니 꽃향기 하늘 아래 가득히 흐르네!
 
베트남 국민들이 사랑한 낭만파 시인 ‘한막뜨’는 아름다운 어촌 마을이 있는 무이네에서그의 불멸의 연인 ‘몽껌’이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결국 저주받은 한센 병에 걸려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쿠이년으로 떠나게 된다. 계란처럼 생긴 대형 몽돌로 가득한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의 부인 남프엉 황후가 즐겨 찾았다는 해안, 겐랑 언덕에 올라 천국 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보며 그에게 날아든 가혹한 운명과 슬픈 러브스토리를 달래면서 아름다운 편지 형식의 시로 승화시킨다. 그는 결국 거기서 28세 짧은 생을 마쳤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면 인생은 아름답다.” 한막뜨 시 ‘여기는 비야마을이다’의 한 문장이다. 겐랑 언덕에는 한막뜨의 시 중에서 한 구절을 따 그의 필체로 새겨놓은 돌 기념물이 있다. 한막뜨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승 판 보이쩌우를 만나면서 문학에 눈을 떴다. 그는 베트남 현대문학사에 새로운 낭만파를 탄생시킨 인물이다.
 
그의 사랑에 관한 시어는 국민들이 애송할 정도로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프랑스 유학을 원했지만 식민당국이 허락하지 않아 사이공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한막뜨의 죽음이 가혹한 운명과 슬픈 러브스토리의 한 단면을 보여주려는 듯 그의 무덤은 세 개가 있다. 한막뜨의 첫 무덤은 한센마을이 격리 운영되었던 마을 인근에 있었다. 그곳에 묻힌 이유는 ‘죽음 소식을 전할 사람이 없어서’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 지금은 휑하니 기념탑만 서있다. 두 번째 무덤은 바로 황하우비치 인근에 조성되었다. 나중에 그의 죽음을 듣고 찾아온 친구가 새 무덤을 만들었다.  가장 존경하는 성모마리아상 아래에 묻어 달라!”는 평소의 유언 그대로이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겐랑 언덕의 성모마리아상 아래로 옮겨졌다. 지금은 여기에도 그의 시신이 없다고 한다. 훗날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고향 꽝빈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가짜 무덤도 향불은 꺼지지 않고 사람들의 발길은 끊기질 않는다. 특히 여성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평화달리기 47일차인 지난 16일 베트남의 한 거리에서 만난 여성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최기철 기자


- 경제전문 멀티미디어 뉴스통신 뉴스토마토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