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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25)반얀나무와 바나나나무
입력 : 2022-11-25 오후 2:04:16
베트남의 당산나무는 반얀나무이다. 불교와 힌두교가 신성한 것으로 숭배하여 사원 주변에 주로 심지만 마을 입구나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다. 오래된 반얀나무는 마을 지킴이로서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신격화된다, 반얀나무가 수많은 뿌리를 가지로부터 드리우는 이유는 태생적으로 뿌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줄기는 계속 굵어지고 오래된 나무는 울퉁불퉁하다.
 
나무는 수많은 기근이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줄기 둘레가 10~20m나 되는 것도 있다. 그래서 쓰러지지 않고 살기 위하여 가지에서 땅으로 뿌리를 내려 자신의 몸을 지탱한다. 반얀나무는 땅이 지하수를 저장하는 것을 돕는 특성이 있는 나무이다. 그리하여 지혜의 나무라는 별칭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번식력이 강하다. 한 그루에서 끊임없이 가지가 퍼질 뿐만 아니라 한 가지에서 여러 개의 받침뿌리가 나와 독립적인 나무가 되어 금방 숲처럼 된다. 배타성이 강해 빽빽하고 거대한 반얀나무 밑에서는 모든 영양분이 차단되어 어떤 식물도 자랄 수 없다.
 
고고한 반얀나무 아래 향불이 타고 있다. 그 나무는 오늘도 내가 비를 맞으면서 달리는 이유를 알고 있겠지! 왜 사람들이 나에게 물고 건네주고 가고, 과일도 건네주며, 심지어 바나나 껍질에 싼 찰밥도 건네주는지 알 것이다.
 
그 반얀나무는 보았을 것이다. 옛 왕조의 흥망성쇠와, 한때 그 미친(美親) 바람이 몰고 온 폭력과 야만을! 그리고 그 미친 바람을 몰아내고, 다시 그 미친 바람과 화해하고, 그 미친 바람을 이용하여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것을!
 
바나나나무도 번식력이 강하다. 나무뿌리에서 6개월이면 새순이 무사히 나와 그 뿌리를 잘라 심으면 짧은 시간 안에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서 바나나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바나나 나무는 배타적이지 않다. 나무의 잎사귀는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어 주위의 식물들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다른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제 세계는 바나나 나무와 같이 함께 생존하고 함께 성장해야 한다.
 
바나나나무 그늘이 있는 곳에서 베트남 유명 유튜버가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나를 인터뷰를 하였다. 인터뷰 장면을 페이스북에다 올렸더니 몇몇 베트남 페친이 알아보고 유명한 유튜버이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그는 인터뷰 후에 출연료 겸 후원금으로 즉석에서 현금 160만 동을 지급해주었다. 역시 상셍의 바나나 그늘이 역시 좋았다.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며 베트남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최초로 통일한 왕조이다. 떠이 선(西山) 반란군에 쫓긴 어린 응우옌 푹 아인은 무수한 왕과 왕족들이 살해당하는 와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는 메콩 지역을 전전하며 피해 다니다 사이암(태국)에 두 번이나 망명했다. 그를 따르는 군대도 없고, 지원하는 나라도 없었다. 백성도 영토도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왕은 생존 본능만 남은 야생의 짐승 같은 존재가 되었다.
 
떠돌아다니던 그는 타이 만에 있는 푸 꾸억 섬에서 프랑스 선교사 피뇨 드 베엔느 주교를 만났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신부에게 모든 것을 건 도박을 했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장남 응우엔 푹 까인을 베엔느 주교에 딸려 프랑스에 보내 루이 16세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 재정 파탄으로 혁명 전야에 있던 프랑스도 지원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 사이 응우옌 푹 아인은 사이공을 점령했다. 그는 군벌 보 타인을 사위로 삼아 다시 지단(사이공)을 장악하고 금으로 만든 꽃을 사이암에 조공으로 받쳐 지원을 얻어냈다. 6년여 만에 돌아온 베엔느 주교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주선하는 일은 실패하였지만 사비를 털어 용병을 모집했다. 주인이 수시로 바뀌었던 사이공을 보방식 요새로 개축했다. 사이공 성이 완공된 이후 응우옌 푹 아인의 확고한 통치하에 놓였다.
 
또한 베엔느 주교는 사재를 털어 최신형 프릿킷함 2대와 용병 300명을 끌어 모아 응우옌 푹 아인을 도왔다. 이런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이 떠이 썬을 이겨낼 원동력이 되었다. 거기에 메콩 델타의 경제적 능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응우옌 푹 아인은 프랑스 세력을 앞세워 떠이 선 왕조를 물리치고 베트남믜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열고 남북을 통일하였다. 이때부터 국호를 비엣남으로 부르게 됐다.
 
선진 기술로 무장한 군대는 재래식 무기를 가진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었다.
 
1802년 통일을 이루어낸 응우옌 푹 아인은 오늘날의 베트남 영토의 영역을 확보했으며 1803년 ‘남비엣’이라는 국호를 인정해달라는 사절단을 청나라에 보냈다. 청나라 정부는 ‘남 비엣’이라는 국호가 예전 찌에우 다가 건국했던 ‘남비엣’과 겹친다며 ‘비엣남’이 어떠냐고 먼저 제안했고 응우옌 푹 아인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비엣남(베트남)’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그러나 외세를 끌어들여 베트남을 통일한 대가는 컸다. 그 후 베트남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백 년 동안 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레 왕조 말기 혼란 속에 농민들은 토지를 귀족들에게 빼앗기고, 가혹한 세금과 자연재해로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농민들은 도적의 무리가 되었고, 크고 작은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베트남 최대의 농민혁명이 중부 베트남의 떠이선(西山) 지방에서 일어나 1786년 북부의 찐(鄭)씨 세력과 남부의 응우옌(阮)씨 세력을 타도하고 남북을 통일했다. 이에, 레 왕조의 마지막 왕 찌에우통(昭統)은 청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1789년 떠이선 농민혁명군이 청나라 군마저 대파했다.
 
떠이 선 왕조는 세계 최초의 농민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형제간의 알력과 꽝쭝 황제의 요절하면서 24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떠이 선 반군은 지주와 관료들을 처벌하고 그들의 재산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금을 낮추고 창고의 문을 열어 배고픈 사람들에게 양곡을 나누어주었다. 반외세적인 성격과 개혁정책 등 농민혁명의 방식으로 중국의 개입을 차단하고 남북 베트남을 통일한 것으로, 응우옌 삼형제 중 특히 막내인 꽝쭝은 개혁군주로 현대 베트남인들에게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평화달리기 53일차인 지난 22일 베트남의 한 거리에서 만난 시민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박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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