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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말의 화염병
입력 : 2023-05-08 오전 6:00:00
30년 전 하이퍼소설(Hyperfiction)이란 장르가 언론에 소개됐다. 하이퍼소설은 이야기의 덩어리를 하이퍼링크로 연결해 독자가 그 링크 가운데 하나를 따라갈 수 있는 전자 텍스트다. 독자는 작가가 설정한 하나의 플롯만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에 따라 각기 다른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하이퍼소설은 미국에서 몇몇 작품들이 발표돼 화제가 되긴 했지만 대중화되지 못했다. 오히려 컴퓨터게임이나 SNS에서 하이퍼소설이 추구한 지향이 구현돼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이퍼소설의 문제의식은 현대 사회 커뮤니케이션의 특징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내가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무렵 언어의 한계성을 심각하게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난 학생운동을 하다 구로공단에 위장취업을 할 만큼 열혈 운동권이었다. 운동권의 커뮤니케이션은 늘 확신과 단정의 언어로 가득차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동운동을 했지만 이것이 늘 내겐 불편했다.
 
운동의 언어는 생각을 전하기에, 현실을 설명하기에 너무 경직돼 있고 단호했다. 생각과 현실은 총체적, 연속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있는데 언어는 그것의 어떤 단면을 골라 잘라내고 잔가지를 쳐내고 거기에 더해 계급적 당파성과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맥락을 만들어 그 속에 구겨 넣어야만 비로소 발화의 자격을 얻는다.
 
아마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일지 모른다. <부처님의 생애>를 읽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생각이 멈춰버렸다. 싯다르타 고타마가 정각을 이룬 순간 직면한 것은 바로 언어의 문제였다. 이 진리를 과연 중생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붓다는 언어의 한계를 끌어안고 전법의 길에 나선다. 불경엔 '범천(梵天)의 권유'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중생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붓다는 깨달음을 전할 때마다 언어의 한계를 환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뗏목의 비유, 달과 손가락, 금강경의 즉비시명(卽非是名), 언어도단, 염화미소, 이심전심 등이 그렇다.
 
대승불교의 기틀을 마련한 사상가이자 승려인 나가르주나가 쓴 <중론>에 오면 언어의 한계는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다. 나가르주나는 말은 현실과 진실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A는 B다’는 정의는 모두 오류가 될 수밖에 없고 오로지 ‘A는 C가 아니다’라는 귀류논증을 통해서만 현실과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설파했다. 원효대사는 ‘말에 의지하되 말을 넘어서라(依言眞如 離言眞如)’고 가르쳤다.
 
몇 달 사이 대통령의 말이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대통령이 발음한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를 둘러싸고 양 진영이 팽팽하게 맞섰다.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를 둘러싸고 때아닌 ‘주어(主語)’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는 적어도 말과 글의 맥락과 해석을 따지는 수준에서 논쟁을 벌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단어와 문장의 진본성을 따지는 수준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것 못지 않게 우려스러운 것은 말을 화염병으로 쓰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을 힘껏 상대방에게 던져 유리병이 깨지는 파열음과 함께 불기둥이 확 솟아오르면 일제히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올리며 박수를 친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언어에 대한 나의 고민과 모색은 지극히 사치스러운 호사 취미가 아닐까, 자괴감이 든다. 이 ‘말의 전쟁’에서 경계인은 어디에 서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백승권 비즈라이팅 강사
 
권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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