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는 돌보다 많은 것이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머나먼 이야기가 되어버린 과거의 찬란한 영웅들의 역사이야기와 구름 위에 떠도는 것 같고 막장드라마 같은 그 많은 신들의 이야기와, 화석으로 굳어버린 전설이 있습니다. 거기에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있고 이솝이야기가 있습니다. 굴러다니는 돌을 발로 뻥 차면 이야기가 되어서 뗑그르르 굴러다닐 정도입니다. 봄바람에도 꽃향기에도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습니다. 내 흐르는 땀도 잘 다듬으면 이런 곳에선 이야기로 변신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은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저 멀리서 에데사를 바라볼 때는 절벽 위에 도시가 있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거기까지 손수레를 밀며 오르는 데도 입에서 단내가 났는데 오르고 보니 그곳은 산악지역의 초입에 불과했습니다. 간신히 몇 굽이 오르고 숨을 고르는데 누가 부르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한 중년의 사내가 손짓을 합니다. 카페에서 잠시 쉬고 가라고 한다. 마침 쉬고 싶을 때 잘 불러주었습니다.
그는 커피와 음식을 시키면 계산은 자기가 하겠다고 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나오자 그는 나의 이야기도 모락모락 나오길 보챕니다. “언제 시작했느냐?” “출발은 어디서 했느냐?” “무엇 때문에 달리냐?” “어느 어느 나라를 거쳤느냐?” “지나온 나라의 사람들의 종교와 문화가 다를 텐데 안전에 문제가 없었느냐?” “어디까지 갈 것인가?”
나는 파파를 만나기 위해서 로마까지 달려간다고 설명했습니다. 파파를 만나서 남과 북의 분단 지점인 판문점에 초대해서 그곳에서 ‘평화의 미사’를 보시라고 부탁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Wonderful!” “Bravo!” “Good!”등의 추임새를 넣어 가면서 내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며 들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파파를 만나서 당신의 희망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며 내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추임새를 잘 넣으면 이야기꾼은 저절로 신이 나서 이야기가 술술 풀립니다.
예전에 영화가 생기고 텔레비전이 생기기 전에는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이야기를 해주고 돈을 버는 직업적인 이야기꾼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배우 역할을 그들이 했던 것입니다. 이야기꾼들이 이야기해서 더 많은 돈을 벌려면 더욱 생생하고 재미있어야 합니다. 이야기꾼들은 이야기하면서 자기 흥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청중들의 바람과 흥행 요소를 가미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이야기꾼은 생계수단으로 이야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으로 이야기를 활용합니다. 이야기는 가공할 힘을 발휘합니다. 감동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때로는 역사를 바꾸고는 합니다. 천일야화의 주인공 세헤라자드는 수많은 여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강고한 왕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과연 내가 불편한 두 다리를 절룩거리며 아시럽을 달리며 쏟아낸 이야기가 교황님의 마음을 움직여 판문점에 오시게 할 수 있을까요?
드라마의 뿌리도 그리스에 있습니다. 연극이 종교 및 사회생활의 필수적이었던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초기 연극은 디오니소스 신을 기리기 위해 공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구연(口演) 전통인 판소리가 있고, 중앙아시아에도 수천 년 전승된 광활한 대지에 펼쳐진 영웅의 대서사시 ‘다스탄’ 문학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생각의 원천이 되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꿈의 나래를 펼치게 합니다.
나는 학창시절에 공부하는 것은 싫었지만 이야기는 좋아해서 그리스로마신화나 이솝이야기는 즐겨 읽었습니다. 이야기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사람들의 영혼의 한쪽 끝자락을 자극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정보와 디지털 시대에도 이야기가 가치는 더욱 무궁무진하게 영향력을 확장하며 영화 한 편 잘 만들면 자동차 수천 대를 판 것 보다 더 많은 생산성을 유발합니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이야기로 자신을 표현하는 소통의 방식은 더욱더 가치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솝 우화는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노예이자 이야기꾼이었던 아이소포스가 지은 우화 모음집을 말합니다. 아이소포스는 흔히 이솝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솝우화는 의인화된 동물들을 통해서 재미있게 삶의 교훈을 전달합니다. 이 이솝 우화에 개에 얽힌 이야기가 몇 개 기억납니다.
‘고기를 물고 가는 개’와 ‘늑대에 협력한 개’앞에 것은 고기를 물고 다리를 건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더 큰 고기를 물고 있는 다른 개로 알고 그것을 뺏어 먹으려고 명명 짓다가 물고 있던 고기를 물에 빠트렸다는 이야기이고, 다음은 늑대가 양 우리를 지키는 개보고 우리는 자유롭게 어디든 다니면서 고기를 마음껏 먹는데 너희는 양 우리나 지키면서 인간이 먹다 남은 밥찌꺼기만 먹지 않느냐, 어서 양 우리를 열고 우리와 같이 다니자는 제안에 그만 양 우리 문을 열었다가 그만 늑대들에게 먼저 잡혀 먹힌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이 개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요즘 우리 정부가 동맹이라는 꼬드김에 넘어가 울타리 문을 열었다 그만 동맹한테 개털림 당하는 것 같다는 착잡한 생각을 하면서 산등성이를 내려오는데 저만치서 양떼의 무리가 보이는가 싶더니 목양견 열 마리 정도가 내게 달려들어서 맹렬하게 짖으면서 으르렁거리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부활절 휴일이라 지방도로에는 오전 내내 차 열 대 남짓 지나간 게 전부였습니다. 백주대낮에 대로에서 활극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도움을 요청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 가드레일 쪽을 등지고 손수레로 앞을 막으며 개들을 진정시키려고 얼마나 진땀을 흘렸을까요? 마침 픽업트럭이 지나가기에 소리를 쳤습니다. “Help me!” 차에서 청년 둘이 내리더니 돌을 집어서 던지면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무사히 안전지역을 벗어나자 다시 차를 몰고 갔습니다.
도대체 이야기가 굴러다니는 돌보다 더 많은 나라에서 살아온 콘스탄은 왜 내 발바닥에 묻혀온 이야기를 목마른 사람 모양 턱을 치받치며 들었을까요? 나는 내 종아리에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불꽃같이 피어나는 이야기를 담아낼 것입니다. 나는 나의 달리기 이야기의 결론은 나도 모릅니다. 이야기꾼이 듣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가며 즉흥적으로 이야기의 물줄기를 틀 듯이 나의 ‘평화 달리기’ 이야기도 듣는 사람들의 추임새에 따라 변할 것입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기가 막힌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를 고대합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평화달리기 199일째인 지난달 18일 그리스에서 만난 주민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강명구 평화마라토너) ?
강명구 평화마라토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