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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대의 곡직)한국전쟁과 판문점회담 그리고 정전협정
정전협정 70주년 특별 기고…열전을 막고 냉전을 맞다
입력 : 2023-07-27 오전 6:00:00
한국전쟁은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역사적 현상을 보여준다. 미국-소련 냉전의 한 가운데서 치러진 대리전은 20세기 전체를 관통하며 세계 패권질서를 만들어왔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멎은 지 70년 세월이 지났다. 민족의 비극은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을 통해 멈춘 듯 보이지만 그 화마의 고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정전은 종전으로 매듭 짓지 못했고, 평화협정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일상화된 군사적 긴장은 이제 익숙함으로 대체돼 가고 있다. 분단의 현실을 직시한 판문점은 1953년 7월27일, 그날에 멈춰있다. <편집자 주>
 
1950년 6월25일 시작된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남진과 북진 끝에 형성된 전선은 3.8선을 중심으로 교착상태에 놓였고, 전쟁도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한국전쟁은 이미 1948년 남북 단독정부 수립 후 예고된 것이었다. 남북협상을 성원한 108명의 문화인들이 예견했듯 "내쟁(內爭)같은 국제전쟁(國際戰爭)"이자 "외전(外戰)같은 동족전쟁(同族戰爭)"은 한국전쟁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한국전쟁은 시기적으로 크게 4개 국면으로 구분된다. 제1국면(1950년 6월25일~9월중순)은 북한군 공세기로 전쟁이 발발한 6월25일부터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전세가 역전된 9월중순까지를 의미한다. 전쟁 초 이승만 정부는 우왕좌왕했다. 북한 인민군은 전쟁발발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고, 이후 각 지역을 빠르게 점령하며 남진했다. 그 결과 낙동강이남 일부 경상도지역과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북한 인민군에 의해 점령됐다.
 
사진은 1950년 물자보급을 위해 인천항에 정박한 연합군 전차상륙함의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제공, 뉴시스 사진)
 
전쟁의 일대 반전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달라졌다. 전쟁 3개월여 만인 9월28일 서울이 수복됐고, 인민군은 빠르게 후퇴했다. 제2국면(1950년 9월중순~11월말)인 유엔군 공세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11월까지 유엔군의 공세는 유지됐다.
 
중국은 3.8선 이북으로 미군이 진격하는 것에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결국 미군 공격에 대한 방어전에 돌입하면서 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어 돌격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을 넘어 국제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중공군 참전 이후 북한 인민군의 공세가 다시 시작됐다. 한국전쟁은 그렇게 제3국면(1950년 11월말~1951년 4월초)을 맞이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평양에서 도망치듯 철수했고, 중공군 제3차 공세가 이뤄진 '신정공세'에서 서울은 또 한 번 함락됐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1·4후퇴를 전후하여 고향을 버린 채 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후 전선이 회복되면서 한국전쟁은 제4국면(1951년 4월초~1953년 7월27일)을 맞게 된다. 정전협상기가 그것이다.
 
사진은 1950년 김포로 이동 중인 맥아더 장군과 해병대원들의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제공, 뉴시스 사진)
 
전쟁 발발 1년 후 시작된 정전회담
 
1951년 전쟁의 양상은 전면 대공세보다 소규모 국지전 위주로 바뀌었다. 특히 전선이 교착상태에 놓이면서 전쟁을 주도한 양측은 더 이상의 전쟁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북한은 지상전을 치를 여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중국 역시 여섯 차례 대규모 공세로 수많은 인명피해를 봤다. 미국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1951년 6월까지 7만8800명의 인명손실을 보았고, 전쟁 비용은 10억 달러를 상회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첫 해 지출한 비용의 두 배가 넘는 돈이었다.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의 지지도는 전쟁의 장기화로 급락했다. 결국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정전협정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었다.
 
트루먼은 앞서 1951년 4월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를 전격 경질했다. 전쟁 초부터 원자폭탄 사용을 주장한 맥아더는 중국과의 확전을 원했다. 그는 만주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 30여 발에 달하는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공산권이 접근할 수 없는 방사능 방어지대를 만들 구상을 갖고 있었다. 반면, 트루먼은 전쟁이 중국으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했다. 한국에서의 전쟁이 한반도 내의 제한전임을 거듭 강조했다. 전쟁이 중국 본토로 확대될 시 소련 참전과 더불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아울러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에 대한 부담 역시 상당했다. 결국 정치적 상황은 물론 권력 대립 등이 더해지면서 맥아더 경질이 이뤄진 것이었다. 미국은 맥아더 해임 후 "적절한 휴전장치 하에 한국에서의 전쟁상태를 종결"해야 한다고 정전회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혔다.
 
미국의 입장이 있은 뒤 공산진영에서도 관련 논의가 이뤄졌다. 1951년 6월13일 북한, 중국,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갖고 "38도선을 경계로 휴전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6월23일 유엔주재 소련대사 야콥 말리크(Jacob Malik)는 라디오방송에서 한국에서의 무력충돌 문제 해결과 관련해 "38도선으로부터 상호 군대의 철수를 가능하게 할 '정전과 휴전'에 목표를 두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정전과 휴전은 전쟁을 잠시 중단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내용상 차이가 있다. 정전은 문서화를 통해 협정이 체결되는 것으로서 적대적 행위의 종식과 관련해 휴전보다 더 강한 의미를 지닌다. 반면, 휴전은 정전보다 호전적인 의미로 쓰이며 문서화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강제력이 약하다. 정전은 또 종전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체결된다. 때문에 추후 평화협정과 같은 정치적 선언을 통해 전쟁을 완전히 끝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953년 7·27정전협정은 그런 측면에서 종전선언을 위한 전단계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 정부는 말리크 발표의 진의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이 소련의 공식 입장인 것을 확인한 뒤 관련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됐다. 트루먼의 재가를 받은 미국 정전회담 제의서는 1951년 6월29일 맥아더의 후임 유엔군사령관인 매슈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에게로 보내졌다. 리지웨이는 다음날인 6월30일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정전회담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원산항에 정박 중인 덴마크병원선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했다.
 
사진은 1951년 한국에 파병된 유엔연합군의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제공, 뉴시스 사진)
 
유엔군의 정전회담 제의에 공산진영도 분주해졌다. 북한 김일성이 앞서 6월29일 소련의 스탈린(Joseph V. Stalin)에게 자문을 구한데 이어 6월30일 중국 마오쩌둥(毛澤東)도 스탈린에게 의견을 구했다. 마오쩌둥은 7월15일 정전회담을 갖고 장소는 해주에서 하겠다고 제의했다. 원산이 요새화된 북한 해군기지임을 감안할 때 추후 유엔군의 상륙작전이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조치였다. 마오쩌둥의 제안에 스탈린은 회담장소를 38도 선상의 개성으로 수정하고, 북한인민군사령관 김일성과 중국의용군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서명이 있는 정전회담 제의를 리지웨이에게 곧바로 전달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스탈린 조언대로 공산군 측은 7월1일 중국 북경방송을 통해 정전회담 제의를 수락하는 통지문을 발표했다. 양측은 이에 7월8일 개성 광문동의 한 민가에서 예비회담을 갖고 공식적인 회담 장소와 안전 조치 등에 대한 내용을 협의하게 된다.
 
1951년 7월10일 개성 외곽의 내봉장에서 마침내 첫 정전회담이 열렸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1년여 만에 양측 대표단이 정전협상 테이블에 앉은 것이다. 내봉장은 일제강점기 고급요정으로 사용됐던 한옥으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 7월26일 의제가 결정되면서 27일부터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됐다.
 
<1951년 7월 26일 합의한 회담 의제 5개항>
제1항 회담 의제의 채택
제2항 한국에서의 적대행위 중지를 위한 기본조건으로서 양측이 비무장지대를 설치할 수 있도록 군사분계선을 설정
제3항 정전 및 휴전에 관한 조항의 수행을 감독할 기관의 구성, 권한 및 기능을 포함한 한국에서의 정전과 휴전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협정
제4항 포로에 관한 협정
제5항 쌍방의 관계 제국 정부에 대한 건의
 
초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문산에 설치된 유엔군 측 정전회담 기지인 '평화의 천막촌'에 있던 외신기자들은 6주 내에 회담이 타결될 것으로 보고 출장 일정을 비교적 짧게 잡았다. 그러나 이는 속단이었다. 회담은 지지부진한 채 이후 2년의 시간이 걸렸다.
 
정전회담 장소인 개성은 양측 협의에 따라 어느 쪽도 점령하지 않은 전선 사이에 위치했다. 앞서 리지웨이는 정전회담 대표단의 안전을 위해 회담 장소인 개성을 중심으로 반경 2.5마일 범위 내는 중립지대로 삼을 것을 요구했고, 공산군 측도 회담이 열리는 동안 개성이 공격대상에서 제외될 것임을 통보했다. 그러나 남북 접촉선이 대체로 판문점 부근인 점을 감안할 때 개성은 분명 북측 진지에 해당했다. 유엔군도 이를 의식해 개성에서의 회담이 정치·심리적으로 공산군 측에 유리할 것이라고 경계했다. 그리고 우려는 본 회담 첫날부터 드러났다. 양측은 사전 협의에 따라 오인사격 방지용 백기를 달도록 했는데, 공산군 측은 유엔군 대표단 차량을 개성 시내로 인도하면서 마치 항복행렬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또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북측의 무력시위 등도 잇따랐다. 결국 회담 장소의 중립성 문제 등으로 8월23일 회담은 결렬됐다. 리지웨이는 개성에서의 회담을 거부하고 공산군 측에 새로운 회담 장소를 제안할 것을 요구했다.
 
사진은 1951년 미 제25사단 소속의 탱크부대가 적진을 향해 포격하고 있는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제공, 뉴시스 사진)
 
판문점회담 재개, 그리고 정전협정
 
리지웨이의 요구에 공산군 측은 개성과 문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변 낡은 주막거리를 정전회담 장소로 통보했다. 임진강 지류인 모래내에 널문다리(판문교)가 있어 널문리라는 지명이 붙은 곳이다. 또 널빤지로 만든 대문이 많다하여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널문리는 회담 공용어(한글·중국어·영어) 가운데 중국어 표기가 어려웠다. 이에 한자음으로 표기할 수 있도록 명칭을 판문점(板門店)으로 바꾸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던 널문리는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된 판문점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북측은 주막집과 초가집이 있던 장소에 급히 천막을 치고 회담장을 만들었다.
 
1951년 10월25일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이 재개됐다. 앞서 합의한 기본의제 5개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난항을 거듭한 의제는 제2항 군사분계선 설정과 제4항 포로협정에 관한 의제였다. 판문점 회담 재개 다음날인 10일26일 합동분과위원회에서 양측 대표들은 군사분계선 설정을 놓고 줄다리기 협상을 이어갔다.
 
북한은 군사분계선 설정을 현 접촉선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전략지인 개성은 북한 측 영토가 된다. 반면, 리지웨이는 정전 조인 시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결국 1952년 1월17일 유엔군은 협상의 조기 타결을 위해 현 접촉선을 잠정 군사분계선으로 하되 30일내 정전협정이 조인될 경우에만 관련 내용이 유효하다는 수정안을 냈다. 그러면서도 30일 이내 정전협정이 이뤄지지 못할 시 당시 접촉선을 새로운 잠정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도록 했다. 양측은 1월23일 관련 내용을 중심으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치에 대해 합의했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른 250km에 달하는 군사분계선은 그렇게 설정됐다.
 
공산군과 유엔군 측이 합의한 군사분계선은 200m 간격으로 1292개의 말뚝이 세워졌다. 서쪽 끝 ‘0001호’부터 동쪽 끝 '1292호'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진 표지판이 점으로 연결됐다. 군사분계선은 선이 아닌 점의 개념이었다. 양측은 또 군사분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2km씩 물러나 군사분계선 전역에 걸쳐 폭 4km의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를 설치했다. DMZ는 그렇게 분단의 현실과 통일의 필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
 
정전협정 의제 가운데 양측이 가장 오랫동안 대립한 조항은 포로협정 문제였다. 1951년 12월11일 합동분과회의에서 정식으로 논의가 시작된 포로 문제는 답보상태를 유지했다. 유엔군은 포로의 일대일 맞교환을 주장했다. 전쟁 초 '민간인 억류자'까지 전쟁포로로 분류한 건 일대일 포로교환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북한군 억류포로가 유엔군 억류포로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안 뒤 더 이상 민간인 억류자를 포로로 분류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후 제시된 안은 포로 본인 의사에 따른 자원송환 원칙이었다. 북한군은 포로에 대한 전원송환을 고수했다. 특히 "포로는 종전 후 지체 없이 석방되고 송환되어야 한다"는 제네바협정 규정을 들었다. 포로송환 문제는 접점 찾기가 쉽지 않았다.
 
1953년 정세는 급변했다. 미국은 한국전쟁 종전을 주요 대통령 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행정부가 출범했고, 소련의 절대 권력자 스탈린은 1953년 3월5일 급작스레 사망했다. 정전회담은 급진적인 계기를 맞았다. 포로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유엔군 측은 부상포로 교환을 제의했다. 공산군 측도 스탈린 사망 후 3주 뒤 이에 화답했다. 공산진영의 상병포로 교환 제의 수락은 전체포로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를 반영하듯 1953년 4월26일 제123차 본회담이 재개됐다. 1952년 10월8일 회담이 중단된 뒤 6개월여 만이었다. 그리고 정전협상 최대 암초를 풀기 위한 한 방법으로 '중립국 선택'이 주어졌다. 그렇게 양측 간 합의점을 찾으면서 1953년 6월 8일 포로교환 문제가 최종 타결되기에 이른다. 정전회담의 가장 큰 걸림돌이 해결되자 정전협정도 곧바로 체결이 가능했다.
 
사진은 1953년 판문점에서 휴전서약서 서명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제공, 뉴시스 사진)
 
1953년 7월27일 판문점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날 오전 10시 유엔군과 북한군, 그리고 중공군 3자간에 정전협정 조인식이 체결됐다. 1951년 10월25일 판문점회담이 재개된 뒤 159회 회담과 575회 공식회의 끝에 이뤄낸 협정이었다. 이로써 3년여 간의 적대적 행위도 멈추게 됐다. 전쟁 당사국인 한국정부는 그러나 정전 문제에 대한 정책결정 및 협의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이날 정전협정 조인식에 한국은 빠져있었다.
 
군 장병들은 정전협정 체결 소식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고지전을 탈환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정전협정 발효 시점이 이날 22시였던 탓이다. 정전협정 체결 후 12시간 동안 전방에는 한 줌의 고지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모든 화력이 집중됐다. 무의미한 싸움이 또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22시를 기해 약속이나 한 듯 정적이 찾아왔다.
 
정전협정 시차가 발생한 건 7월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과 북측 수석대표 남일이 정전협정을 조인했으나 이날 오후 1시 문산에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가 사인하고, 이후 평양에서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김일성이 사인하는 절차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또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펑더화이가 서명하면서 정전조인 절차가 최종 마무리될 수 있었다. 한반도는 동-서(東西) 냉전의 화약고가 된 채 정전을 맞이했다.
 
사진은 1953년 정전 협정 체결 이후 구성된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제공, 뉴시스 사진)
 
'열전'을 막고 '냉전'을 맞다
 
한국전쟁기 정전회담은 개성회담과 판문점회담으로 구분된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은 좀 더 유리한 협상을 이끌기 위해 수많은 회담을 가졌다. 2년여 간 이어진 정전회담 의사록만도 어른 키를 훌쩍 넘길 만큼 많은 양의 문서가 생산됐다. 1950년 6월25일 시작된 전쟁은 그렇게 3년 1개월 2일 만인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로 끝났다.
 
한국전쟁은 내전의 양상을 띤 국제전이었던 만큼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역사적 현상을 만들어냈다. 한반도를 양분하고 있던 남-북 두 정권의 내전이었으나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른바 초강대국을 포함한 세계의 열강들이 참전한 최초의 그리고 마지막 세계전쟁이었다.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그런 측면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50년 세계전쟁'의 시작과 끝이 한반도에서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1904년 한반도 패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러일전쟁과 1953년 7·27정전협정이 그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세계 패권질서는 더욱 두드러졌다. 냉전적 대치상태는 격화됐고, 사상적 이념대립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세계를 반분했다. 한국전쟁은 그러나 냉전(Cold War)이 더 이상 열전(Hot War)이 되지 않도록 국제적 합의구조 형성에 기여한 측면 또한 크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한국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3차 대전을 대신하여 한국전쟁을 치름으로서 세계전쟁을 막고 있다는 의미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소 강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는 냉전체제로 급속히 양분됐다. 힘의 균형은 두 나라를 중심으로 지탱됐고, 국제질서는 냉전을 통해 유지됐다. 전쟁을 기화로 '내부의 적'을 무수히 제거한 남과 북의 지도자는 각 체제 안에서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진영 간 대립은 고착화됐고, 체제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고해진 채 한반도의 정치질서를 유지하는 강력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
 
한국전쟁은 1953년 7·27정전협정으로 총성을 거뒀다. 하지만 끝나지 않은 전쟁은 한국사회를 지배하며 오늘날까지도 이념 대립의 원천이 되고 있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냉전의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한국전쟁 이후 고착화된 미-소 냉전의 시대가 그랬고, 한반도를 갈라놓은 남-북 분단의 시대가 그랬다.
 
참고자료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9) : 휴전회담 개막과 고지쟁탈전』, 2012.
김보영, 「한국전쟁 휴전회담 연구」, 한양대학교 박사논문, 2008.
니얼 퍼거슨, 『증오의 세기』, 이현주 역, 민음사, 2010.
박명림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6권, 한길사, 1990.
박태균, 「정전협정과 종전선언」, 『역사비평』 123, 2018.
정찬대, 「전쟁포로의 또 다른 경계 : 한국전쟁기 빨치산 포로수용소 연구」, 『사회와 역사』 132, 2021.
 
정찬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위원
박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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