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미국의 일방적이며 불공정한 편가르기식 대외정책으로 인하여 국제관계 구도가 '신냉전' 구도로 변화되고 있다."(2021년 9월 최고인민회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국제관계 구도가 '신냉전' 체제로 명백히 전환되고 다극화의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2021년 12월 조선노동당 전원회의, 김정은 위원장)
"미중 신냉전이 격화하면서 한국 대외전략의 선택지가 시험에 올랐다. 지난 5년 사이 본격화된 미국의 대중 봉쇄정책은 마치 과거 소련에 했던 것처럼 중국이 미국 앞에 완전히 굴복하고 쓰러질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2021년 여름,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현 국가안보실 1차장, '미-중 신냉전 시대 한국의 국가전략'논문)
"70년 전 시작된 냉전과 30년 전 시작된 탈냉전 시대가 그랬듯,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본격 개막한 신냉전 역시 대한민국이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세계사적 흐름"(2023년 4월, 국회 국방위원회 국민의힘 간사 신원식 의원-현 국방장관)
기시다 후미오(왼쪽) 일본 총리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월 16일(현지시각) 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양자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근 국제정세에 대한 남
·북한 외교안보분야 최고위 인사들의 인식이 일치합니다. 양극단에 서 있는 인사들인데, 기본 정세인식은 놀랍게도 똑같네요. 그렇다면 과연 현재 국제정세가 '신냉전'일까요?
"미중 간 경쟁은, 이 방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의 일생 동안에도 명확한 결승선(finish line)은 없다…중국도 미국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2023년 6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미국외교협회 대담 )
"우리는 소련 붕괴와 같은 혁신적인 최종 상태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미국이 이득을 얻겠지만 중국도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2023년 10월,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 ’포린 어페어스‘ 기고)
"미국과 중국은 아직 냉전 상태에 있지 않다.(America and China Are Not Yet in a Cold War). 하지만 더 나쁜 상황으로 치닫게 해서는 안 된다."(2023년 11월, 시진핑 주석의 외교 책사 왕지스 베이징대 국제관계대학원장 ’포린 어페어스‘ 기고)
미중 경제관계, 일론 머스크 "샴쌍둥이"-그레이엄 앨리슨 "상호확증경제파괴"
'미중 신냉전'론이 처음 제기될 때부터 반론이 강했습니다. 중국은 과거 소련처럼 사회주의를 강하게 내세우지 않았고, 타국에 '수출'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타협 불가능한 이념 갈등이 아닌 겁니다.
더 중요한 대목은 경제분야입니다. 과거 미국과 소련은 완전히 분리된 경제권이었으나 지금 미국과 중국은 다종다양하게 얽혀있어, 지난해 미중 교역은 7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미중 경제관계를 두고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샴쌍둥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유명한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가 "상호확증파괴와 유사한 상호확증경제파괴(mutual assured economic destruction) 상황"이라고 비유하는 배경입니다.
그렇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첨단 반도체 분야 등에서 피 튀기는 쟁투를 벌이고 있으나 그 실체는 전략경쟁, 패권경쟁이기는 하지만 아예 상대방을 죽이려는 '총만 안 든 전쟁' 즉 '냉전'을 재현하는 상황은 아닙니다.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 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에게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등 이른바 '5불(不)'을 약속해준 바 있습니다. 1년 뒤인 올해 11월 정상회담에서도 이를 재확인하면서 정상 간 핫라인과 고위급 군사대화를 재개하기로 했습니다.
미국만 이런 게 아닙니다. 일본은 중국과 각을 세우는 다른 한 편에서는 외무·국방 장관(2+2) 회담을 하고 군사 당국 간 핫라인을 만들었습니다. 11월 샌프란시스코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정상회의에서도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는 충돌하면서도 소통·교류 확대에는 합의하는 노련미를 보였습니다.
미중 사이를 오가는 베트남의 모습은 현란하기까지 합니다. 지난해 6월까지 '미국-베트남 전쟁'의 상징적 장소 중 하나인 다낭에 미국 항공모함이 세 차례 기항했고, 9월에는 대중전선 합류를 설득하려고 바이든 대통령이 방문했습니다. 그런 베트남이 11월 하순에 캄보디아 등 다른 아세안 4개국과 함께 중국 광둥성에서 합동군사훈련을 한 겁니다.
호주는 미국이 공들인 쿼드(QUAD)와 오커스(AUKUS)의 핵심국가입니다. 7년간 중국과 갈등해 온 이 호주기 지난해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의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가 정권을 잡은 뒤 방향을 바꿔, 지난 11월에는 앨버니지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30년간 굳어진 '한중일' 호칭을 실익도 없이 중국의 감정만 상하게 하는 '한일중'으로 바꾸는 우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중관계가 괜찮으면 중국내 탈북자 북송 문제와 같은 예민한 사안도 어느 정도는 해결 가능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근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2014년 10월 APEC 정상회의에서 만난 시진핑 주석에게 중국에 억류된 탈북자 11명의 북송 중단을 요청했고, 시 주석이 이를 수용해 한국으로 인도했다고 합니다.
중국·러시아도 '신냉전'에 거리 둬
중국과 러시아도 신냉전에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지난 3월 시진핑 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양국의 관계는 냉전시대와 같은 군사·정치동맹적 성격이 아닌, 제3국을 겨냥하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이는 물론 러시아보다는 중국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종합해 보면, 남·북한만 신냉전을 운운하는 형국입니다. '신냉전', '한중일 대 북중러'는 고립 상태인 북한이 바라는 구도입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사실상 대미 관계 개선을 포기하고 중국과 러시아 쪽으로 전략 방향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11월 28일 오후(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외곽 팔레 데 콩그레에서 열린 제173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2030년 세계박람회 개최지 선정 투표결과가 프레스센터 모니터에 표시되고 있다. 1차 투표 결과 사우디 119표, 한국 29표, 로마 17표로 한국은 엑스포 유치에 실패했다. (사진=연합뉴스)
신냉전이라는 부정확한 정세인식에 근거한 이념외교, 진영외교는 한국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 참패가 단적인 사례 아닐까요?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3대 국제행사로 꼽히는 (등록)엑스포는 기본적으로 국제정치가 작동하는 무대입니다. 필연적으로 중국 등과 선을 긋는 미국·일본 편향외교로는 대규모 국제행사를 유치하기가 힘겨울 수밖에 없습니다.
엑스포 유치전 압도 사우디…미중 사이에서 유연한 외교
엑스포 유치전을 압도한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는 우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중동의 전통적·대표적 미국 맹방이지만 중국의 중재로 오랜 앙숙인 이란과 7년 만에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합의하는가 하면,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떠나자마자 바로 다음 날 중국과 100억달러 규모의 투자 합의를 발표해버리기도 했습니다.
종교색 짙은 왕정국가인 사우디가 이렇게 국익을 중심으로 유연하고 자유로운 외교를 펼치고 있는 반면, 민주공화국인 우리가 오히려 이념과 진영에 스스로를 묶은 채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겁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