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실제 역사 속 모티브가 된 인물, 그 인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우선 배우 박해준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 ‘서울의 봄’ 마지막 장면을 빗대서 표현했습니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12 사태를 그린 내용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이를 조사하던 전두광(황정민)은 자신이 주축이 된 군 내부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고 정권 찬탈을 꿈꿉니다. 모두의 기대와 달리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이들의 목적대로 막을 내립니다. 영화 마지막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도 그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군사반란을 성공시킨 뒤 술잔을 부딪치며 환호하고 축하했습니다. 노래하고 술 마시고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 속에 박해준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회를 이끈 수장 전두광의 죽마고우인 ‘노태건’ 9사단장을 맡아 연기했습니다. 박해준은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장면을 찍기 위해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전했습니다. 노래하고 술 마시며 즐기는 분위기. 마치 촬영을 마무리하고 진행하는 쫑파티 분위기 같았답니다. 너무 기분이 좋고 즐거웠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주 짧은 순간 박해준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그 생각. 그 생각에 박해준은 촬영 중임에도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경험을 했답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라는 그 생각. 주변을 돌아 봤답니다. 살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답니다. 스스로가 너무 싫고 끔찍한 느낌이 들었답니다. 영화 ‘서울의 봄’ 속 박해준은 그랬답니다.
배우 박해준.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서울의 봄’, 요즘 대한민국을 가장 뜨겁게 달구는 영화입니다. 질곡의 현대사 중심에 선 5공화국이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된 12.12 사태의 시작과 계기를 그린 영화. 박해준은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노태건 9사단장(소장)을 연기했습니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더욱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 인물. 처음 김성수 감독으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때 배우 입장에서 부담 이상의 무엇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배역입니다.
“’부담’이란 단어로 표현이 안될 정도였어요. 우선 역사에 그 사람들이 그 당시에 뭘 했고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 명확한 기록도 없고. 분명한 건 제가 인물의 모사를 할 필요는 없어 보였어요. 감독님도 그걸 원하지는 않으셨어요. 시나리오 상에서 전두광이 독불장군처럼 일을 만들어 놓으면 뒤에서 엄마처럼 뭘 수습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더라고요. 그게 노태건이면 되겠다 싶었죠. 그 안에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했던 게 그럼에도 절친인 전두광을 100% 믿지 않는 모습이었죠.”
배우 박해준.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일단 노태건의 실제 모델,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이고 많은 비난을 받아 온 인물. 특유의 말투와 어법 그리고 여러 제스처 등. 배우 입장에선 연기를 하게 될 경우 실제 모델이 갖고 있는 특징을 잡아 내 자신의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특징적인 실제 인물을 연기할 때 수위 조절을 잘못하면 ‘따라하기’, 다시 말해 ‘모사’가 될 가능성이 정말 많게 됩니다. 박해준도 그걸 가장 경계했답니다.
“그게 진짜 제일 걱정이었어요. 나도 모르게 따라하게 될까 봐. 근데 그런 불안감보다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가 있어서 그런 걱정이 자연스럽게 없어진 것 같아요. 더욱이 함께 하는 배우들이 정민 선배님을 중심으로 어마어마 하잖아요. 진짜 너무 기대가 됐어요. 그런 흥분과 재미를 위해 ‘실존인물’이었단 제 생각을 먼저 지워버렸어요. 극중에 ‘믿어주세요’란 대사에서도 우리가 아는 늬앙스가 안 나오게 정말 많이 신경 썼어요(웃음). 그 상황이 아주 급박한 순간인데, 자꾸 그 늬앙스가 나오는 거 같아서 미치겠더라고요. 하하하.”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서울의 봄’에서 박해준이 연기한 노태건은 자신의 육사 동기이자 절친이며 스스로가 주군처럼 모시는 인물 전두광의 그림자를 자처합니다. 전두광은 카리스마와 결단력 그리고 추진력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을 넘어서는 탐욕으로 가득한 모습에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특히 황정민은 특수 분장을 통해 ‘전두광’의 실제 모티브가 된 인물과 거의 흡사한 외모로 등장합니다. 현장에서 그런 ‘전두광’으로 분장한 황정민을 처음 본 박해준의 감상이 궁금했습니다.
“’놀랐다’란 말로는 표현이 많이 부족할 정도였어요. 처음에는 전두광의 민머리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촬영이 다가오면서 ‘분장을 하신다’고 하셔서 ‘그걸 어떻게?’라고 궁금해 지는 정도였어요. 근데 현장에서 그 모습을 처음 본 날이 잊혀지지 않아요. 그 가발을 쓰고 등장하시는 데 숨이 막힐 정도였어요.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람 같았어요(웃음). 정말 가까이서 봤는데 분장이 아니라 머리를 실제로 밀어 버리신 게 아닌가 싶었죠. 무엇보다 사람의 에너지가 달라지시더라고요. 분장 하나로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단 것. 정민 선배이기에 가능한 거였죠.”
영화 '서울의 봄' 스틸.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서울의 봄’, 박해준이 연기한 ‘노태건’ 그리고 황정민이 연기한 ‘전두광’ 여기에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 등이 메인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이들 세 명을 제외하고도 대사가 있는 배역만 무려 68명이나 될 정도로 수 많은 배우들이 출연합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배우들 모두가 이른바 연기로는 ‘한 가닥’하는 베테랑들이었습니다. 이런 배우들과 함께 하는 작업. 배우로서 정말 짜릿하고 즐겁고 또 재미가 있었을 듯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진짜 너무너무 즐거웠어요. 잘 보시면 대사가 한 두 마디 있는 배역들조차 엄청난 내공을 가지신 배우들이었죠. 이런 배우들 조차 촬영 전 리허설을 정말 철저하게 했어요. 길면 한 시간 이상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짧게 느껴졌어요. 이렇게 내공이 깊은 배우들조차 이 정도로 철저하게 하니 실제 촬영에선 척하면 척이었어요. 뭔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뭔가 톱니 하나가 살짝 어긋나도 그걸 어느 누군가 탁 짚어서 제자리로 돌려놔요. 아마 감독님도 진짜 즐거우셨을 거에요.”
배우 박해준.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박해준은 극중 정우성이 연기한 ‘이태신’ 배역에 대한 로망 같은 소감과 함께 자신도 멋들어지고 남자로서 선망의 대상 같은 배역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습니다. 한때 자신이 다닌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최고의 미남이란 뜻의 ‘한예종 장동건’으로 불린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뷔 이후에는 멋진 배역보단 악역과 비열한 배역에 더 많이 등장해 뭔가 아쉬운 마음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무엇이 있는 듯 했습니다.
“(웃음)좀 멋진 남자로 나와 봤으면 하는 것도 없진 않아요. 저희 영화를 보면 이태신 같은 인물 얼마나 멋져요. 군인으로서 끝까지 도리를 다하는 모습, 사실은 그게 당연한 건데 왜 감동일까 싶잖아요. 자신의 일에 책임을 갖고 끝까지 해내는, 계속 지켜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어요. 자신의 본분을 충실히 다한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구나 싶었죠. 난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저 스스로가 많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배우 박해준.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그는 마지막으로 ‘서울의 봄’을 더 많은 분들이 봐주고 더 많은 얘기가 나오고 더 많은 생각들과 더 많은 분들이 몰랐던 우리의 역사를 알아봐 주시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자신도 그저 ‘그랬었다’라고만 전해 들은 얘기를 몸소 경험한 뒤 몰랐던 것을 경험한 것과 그것을 이 나이가 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부끄럽다고 말하는 박해준입니다. 아직은 어린 자녀들에게 만은 자신이 출연한 작품 중 ‘서울의 봄’만은 꼭 보여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너무 다행이라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좋아해 주시고 또 분노해 주시고. 영화에 대해 많은 얘기도 나오고 있고. 영화가 개봉한 뒤 많은 얘기가 나오는 건 배우로선 정말 즐거운 일이에요. 물론 그 얘기 속에서 오해가 생기지는 않았으면 하죠. ‘서울의 봄’이 정말 많은 얘기 다양한 토론의 장을 만들었으면 하다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저희 아이들이 아직 어린데 더 크면 반드시 ‘서울의 봄’만은 보여줄 생각입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