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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바위그림)신석기 예술가의 캔버스, 잘라브루가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⑪)
입력 : 2024-02-05 오전 6:00:00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잘라브루가로 가는 생태산책로와 재건된 다리
 
벨로모르스크 향토박물관 교육연구사(어린이교육담당 학예사)인 마리나 씨의 안내로 숲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그녀가 손을 들어 빽빽이 늘어선 나무들 중 하나를 가리킨다. 나무 위에는 빨간색과 노란색 도형이 그려져 있다. “빨간색 원은 잘라브루가로 가는 경로를 표시한 것이에요. 노란색 세모는 고대 거주지가 발굴된 지점의 옆을, 네모는 암각화 옆을 뜻하지요.” 마리나 씨가 설명했다. 야외 암각화 구역의 시설 관리를 맡고 있는 동료 알렉세이 베르보프 씨가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일일이 길을 개척하고 표시한 것이라 한다. 오랜 세월 제집 안마당처럼 암각화 구역을 드나들다 보니 그에게는 이 숲길이 손바닥처럼 훤하고 백해 암각화에 대한 열정과 지식도 깊어 많은 일을 했다고 마리나 씨가 덧붙인다. 
 
야외 암각화 구역으로 출발하면서 마리나 씨가 준비해온 자료철의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 위는 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에서 잘라부르가로 가는 길이고 아래는 19세기 말 비그강 하구의 지도다. 사진=박성현
 
베소비슬레드키가 있는 전시관에서 잘라브루가로 가는 길이 숲속인데다 한참을 걸어야 해서, 사실 그가 표시해 준 이 빨간 동그라미가 아니었으면 방문객들이 길을 잃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길치인 나는 다음날 혼자 다시 잘라브루가를 찾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표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길을 헤매야 했다. 그가 표시한 노란색 삼각형이 보여주듯이, 백해 암각화 근처에는 신석기시대 거주지부터 중세 후기까지의 고고학 유적이 80군데 이상 발견됐는데, 그중 신석기 문화층 유물의 주인들이 백해 암각화를 제작한 집단과 밀접히 연관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빨간색 원은 잘라브루가로 가는 경로를 표시하고, 노란색 삼각형은 고대 거주지가 발굴된 지점의 옆을 뜻한다.사진=박성현
 
대규모의 야외 암각화 구역인 잘라브루가로 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 뒤편인 비고스트로프 마을에서 이렇게 숲길을 따라 가는 건 우회로이고, 원래는 더 짧은 경로로 다녔다고 한다. 잘라브루가에 가까운 고속도로 근처 주차장에서 출발해 비그강의 키슬리푸다스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가는 방법인데 이 길은 1.3km 정도라 2~2.5km인 숲길보다 훨씬 짧다. 2023년 여름 당시에는 이 다리의 수리를 위해 길이 폐쇄된 상태여서 모두가 숲길을 따라서 가야만 했는데, 2024년 1월 19일자 뉴스를 보니 새 다리가 완공돼 다시 길이 열렸다고 한다! 하지만 비고스트로프 마을에서 숲을 통과해 잘라브루가로 가는 길엔 또 다른 이점이 있다. 도중에 예르핀푸다스섬의 암각화 일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르핀푸다스에 새겨진 ‘카렐리야의 카마수트라’ 
 
예르핀푸다스는 비그강 하구의 큰 섬들 중 하나인데, 수력발전소와 댐 건설이 바꿔 놓은 지형 때문인지 역시 섬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암각화 그룹은 물속의 바위에 있거나 숲길의 바위에 놓여 있다. 풍화작용에 의해 많은 이미지들이 구분할 수 없게 되고 훼손되었다고 한다. 마리나 씨가 보여준 예르핀푸다스의 세 번째 그룹은 상대적으로 나은 상태긴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준비해 온 자료 도면의 이미지가 다 보이지는 않았다. 훼손돼 지워진 형상들도 있고 밝은 햇빛으로 인해 주위의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그림을 가리기도 했다. 오네가호수 암각화 때 언급했듯이, 바위그림의 자태는 일출과 일몰 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너무 밝아도 너무 어두워도 안 된다. 그런데 이날은 그림에 주변의 나뭇가지 그림자가 드리워져 방해하더니 다음날 혼자 다시 왔을 때는 그림자 없이 잘 보이는 것 같다가 곧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위그림을 온전하게 사진에 담아내기가 쉽지 않다. 시간도 날씨도 빛도 도와주어야 한다.
 
예르핀푸다스 암각화 그룹3 앞에서 마리나 씨가 준비해온 자료철의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 위는 베소비슬레드키 파빌리온에서 잘라부르가로 가는 길이고, 아래는 19세기 말 비그강 하구의 지도다. 사진=박성현
 
예르핀푸다스 그룹3의 중심적인 이미지를 좌에서 우로 순서대로 말하면 벨루가(흰고래) 사냥, 큰 엘크(사슴), 성행위를 하는 네 쌍의 인간,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큰 고래다. 그 밖에도 여러 다른 엘크와 순록들, 육지동물과 사람들, 고래 등이 묘사돼 있다. 벨루가에 작살을 던져 사냥을 하는 한 배에는 여러 명이 타고 있는데, 그 옆에서 또 다른 벨루가를 사냥하는 배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몸통이 선명하게 면새김된 커다란 엘크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사실적으로 잘 표현돼 있다.
 
예르핀푸다스 그룹3. 왼쪽과 중앙에 벨루가(흰고래)를 사냥하는 배가 있고 오른쪽 끝에 커다란 엘크가 일부 보인다. 사진=박성현
 
특히 눈길을 끄는 묘사는 일명 ‘카렐리야의 카마수트라’로 불리는 네 커플의 성행위 장면이다. 성생활을 보여주는 암각화 이미지는 늘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네 쌍을 한꺼번에 그러나 각각 다르게 묘사하고 있어 현대인들이 재미삼아 ‘카렐리야의 카마수트라’라는 별명을 붙여준 듯하다. 물론, 카마수트라는 현대인들이 종종 오해하듯 성행위 체위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고대 인도 힌두교의 성사상과 윤리를 집대성한 격언집, 즉 성애에 관한 경전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카렐리야의 카마수트라’ 옆에 고래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 네 커플과 고래가 동시에 새겨졌는지 각각 다른 시기에 새겨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옆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연구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그림을 사진과 도면으로 본 전 한국암각화학회장 이하우 선생님(한국선사미술연구소장)이 필자에게 질문삼아 매우 설득력 있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산과 고래사냥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 연결돼 나란히 새겨진 게 아닐까요?” 과연 더 탐구할 문제다.
 
예르핀푸다스 그룹3 중에서 일명 '카렐리야의 카마수트라'로 불리는 네 커플의 성행위 장면(좌)과 그 옆에 보이는 벨루가(흰고래) 모습. 사진=박성현
 
거대한 바위캔버스, 잘라브루가
 
예르핀푸다스를 지나 좀 더 걸어가는데 마리나 씨가 잘라브루가로 곧장 가기 전에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한다. 그녀를 따라 돌이 무더기로 쌓인 곳으로 가니 강바닥의 물이 말라 있고 독특한 바윗돌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른 쪽에는 커다란 구덩이에 물이 찬 듯, 얕은 강물 위로 나무들과 하늘이 비치는 게 마치 작은 호수 같다. 물 위에 동동 떠 있는 바위섬도 보인다. 이곳은 또 하나의 암각화 지점인 졸로테츠 저수지 구역 그리고 ‘이름 없는 작은 섬들’이 있는 구역일 것이다. 바위들은 깊은 균열에 의해 쪼개져 크고 작은 조각들로 놓여 있다. 독특한 풍경은 비그강 하구가 겪어온 자연환경의 변화와 이 지역의 지질학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암각화를 볼 수는 없었지만 다분히 매력적인 경관이다. 잘라브루가의 암각화를 보면서 자연미와 예술미의 조화를 생각하게 된 것도 이러한 풍광 덕분이 아닐까.
 
잘라브루가로 가는 도중 다른 암각화 지점인 예르핀푸다스, 졸로테츠 그리고 '이름 없는 작은 섬들'을 지나게 된다. 사진=박성현
 
우리는 옆길로 새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왔기 때문에 평균적인 시간보다 훨씬 오래 걸려 잘라브루가에 도착했다. 사실 마리나 씨가 아니었더라면 예르핀푸다스 그룹3의 암각화를 보지도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예르핀푸다스의 네 그룹 중 현실적으로 세 번째 그룹 하나만 볼 수 있었는데, 그 바위 주변에 아무런 안내판이 없어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그 존재를 모르고 빨간색 동그라미를 따라 그냥 잘라브루가로 직행했으리라.
 
드디어 잘라브루가에 도착하자 탁 트인 넓은 공간에 경탄스러운 광경이 나타났다. 매끄럽고 평평한 화강암으로 이뤄진 거대한 캔버스에 선사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듯 정교하게 묘사된 그림들이 찬란하게 펼쳐진 것이다! 잘라브루가를 포함해 백해 암각화는 오네가 암각화처럼 화강암(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편마암)에 석영 도구를 사용해 2~3mm 깊이로 새겨졌는데 거의 면새김으로 제작됐다. 표현물의 크기는 대부분 20~40cm정도로 작은 편이지만 약 3m 길이의 사슴도 있다. 스타라야(구)잘라브루가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사슴이 바로 그것이다! 
 
스타라야(구)잘라부르가의 중심 이미지인 거대한 3마리 사슴을 비롯한 사슴 떼의 계절 이동. 손상되어 형상이 희미하거나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사진=박성현
 
암면의 중앙에 커다란 사슴 세 마리가 오른쪽을 향해 가고 그들의 주위에는 작은 사슴 떼가 열을 지어 이동하고 있다. 이는 사슴들의 계절 이동과 그 틈을 타 진행되는 사슴사냥을 상기시킨다. 거대한 사슴을 배들이 관통하고 그 위쪽에는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의 움직임이 묘사되어 있다. 의인화된 동물과 배도 보이며, 스키를 탄 사람, 사냥하는 사람, 화살에 맞은 사람뿐만 아니라, 손을 머리에 얹고 생각하는 사람, 오네가호수의 태양 기호를 상기시키는 물체와 뱀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사람 등 다양하다. 실로, 수많은 이미지들이 대규모의 한 구성 속에 배치되어 놀라운 장관을 자아낸다.
 
스타라야(구)잘라부르가 암각화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한쪽에 서 있다.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김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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