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국문(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에는 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상황과 대사가 등장합니다. 양반가 자제인 길동이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건 본처가 아닌 첩이 낳은 자식, 즉 서자인 탓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서자는 능력이 있어도 벼슬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예외를 인정받아 과거시험을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합격한다 해도 요직에 등용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작가 허균은 적서차별과 같은 당시 조선시대 신분제의 모순을 소설을 통해 비판했습니다.
최근 이 대사가 머릿속에 맴돈 것은 ‘배드파더스’ 때문입니다. 배드파더스는 이혼 뒤 양육비를 주지 않고 버티는 ‘나쁜 부모’의 이름과 얼굴, 거주지, 직장명 등 신상을 공개해 반향을 일으킨 사이트입니다. 이 노력은 양육비 이행법 시행령 개정이라는 성과로도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트의 운영자인 구본창 대표가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개인들의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한 것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구 대표가 공개한 양육비 미지급자들의 신상 정보는 전부 사실이었음에도 재판부는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행위의 주된 목적이 수치심을 느끼게 해 양육비 이행을 강제하려는 ‘사적제재’에 가깝다고 판단했습니다.
양육비를 주라는 법원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나쁜 부모라 하여도, 그 사실을 말하면 안 된다고 입에 재갈을 물리는 21세기 대한민국 법원의 판단을 보고 있자니, 마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서는 안 되는 홍길동이 살던 시대가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겁니다.
구 대표는 이달 초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했습니다. 정보통신망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유무죄를 가르는 기준인 ‘비방 목적’과 ‘공익 목적’이 불명확하니 위헌성을 가려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실제로 재판부마다 이 기준에 따라 유무죄를 달리 봤습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 1심은 ‘공익 목적’을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지만, 2심과 3심은 ‘비방 목적’을 인정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구 대표의 헌법소원을 대리할 사단법인 오픈넷은 “진실한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훼손될 수 있는 명예는 진실을 은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평판, 즉, ‘허명’에 불과하다”며 “공익적 목적이 넉넉히 인정될 수 있는 활동마저 형사처벌 대상이라 판시한 본 판결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과잉성, 위헌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고 논평한 바 있습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힘듭니다. 또한 국제 인권 기준에도 위반되며, UN도 여러 차레 폐지를 권고했습니다. 앞서 헌재는 2016년에 7대 2로, 2021년 5대 4로 합헌 결정을 했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결론을 내릴지 주목됩니다. 우리 사회는 언제쯤 나쁜 부모를 나쁘다고 말해도 죄가 되지 않게 될까요.
유연석 법조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