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맞아 오랜만에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뵐 때마다 키가 줄어드는 친할머니, 간만에 본 손녀가 뭐 그리 좋다고 활짝 웃으시는데 아랫니 두개가 뿅하고 빠져있었습니다.
걱정하는 제 기색을 눈치채셨는지, 홀홀 웃기만 하면서 "식구들이 차니 집안에 훈기가 돈다"고 분주히 자리를 뜨시더군요. 옆에서는 큰아버지가 "지난해까지만해도 기력이 쇠하시더니 올해는 그나마 기력을 차리셨다"며 "앓던 이가 빠져서 그래요!"하고 농을 치십니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개막일인 지난해 10월 경북 안동 하회마을 공연장을 찾은 시민들이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보며 추석 연휴를 즐기고 있다. (사진=뉴시스)
'풍산 류씨'. 안동 하회 마을로 얘기하면 그래도 아는 사람이 많아, 하회 류씨라고 보통 소개합니다. '안동 권씨'인 할머니는 풍산 류씨 집안으로 시집 와 '서애 류성룡 선생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있으셨는데요. 특히 제사 지내는 것에 대해 강한 의지가 있으셨죠. 그 의지를 받아 저희는 아직도 제사를 지낼 때마다 문중에서 낸 제사책을 보고 드리긴하는데...
아무래도 사는 곳이 많이 떨어져서 그럴까,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은데, 친할머니와 엮인 '이벤트'는 적은 편입니다. 대다수가 명절제사를 지내러 내려가 뵀을 때 뿐이죠. 사실 안동, 문경, 상주 쪽 사투리가 독특한 편이라 어릴 때는 아예 못 알아들어서 '대화'가 된 것은 꽤나 최근입니다. 조금 얘기하셔도 호통이 세서 서울 촌년인 저는 무섭기만 했었거든요. 지금은 아니지만요.
여튼 제가 보기엔 고리타분한 관습들이 할머니 호통이면 단 한 번의 차질 없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장남이 우선이고,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되고,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엔 남자 여자 상은 따로 받았으며, 몇 해 전만해도 인사는 절로 드리던 그런 것들이요.
다만 그 기세에 이변이 있다면 딸인 제가 '최애' 손주 인것입니다. 태어날 때 제가 아들이 아니어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던 조부모님, 제가 깔깔 목젖을 젖히고 웃자 "여자가 그렇게 크게 웃으면 안 된다"고 호통을 치던 할아버지는 저를 무릎 위에 앉혀 키우셨고, 할머니는 언제나 밝고 당찬 제가 좋다며 뒤로 따로 불러 얘기해주셨죠. 손주들 중 제가 가장 좋다며, 언제나 장남 얘기 뒤엔 꼭 제가 자리 했습니다.
그렇게 기력이 세셨던 분인데 올 설에 뵈니 어쩐지 작아진 등이 서글프기만 하더랍니다. '이가 빠진' 할머니는 올 설에도 세뱃돈을 줄 때 제게만 당신이 경로당에서 직접 만든 봉투에 돈을 담아 주셨는데요. 결혼을 하게 되면 저 역시 출가외인이라 하시면서도, "여자는 시집도 잘 가고, 살림을 잘해야한다"며 신신당부하면서도 "너는 네가 하고픈거 다 하라"고 덧붙이신 건 어쩐지 사랑의 연장선이었을까요. 올해는 더 자주 연락드려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