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30주년 기념행사 기념식이 열린 지난 2019년 9월 9일 오후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이홍구 전 국무총리(오른쪽에서 세번째)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국가 원로로 인정받는 것은 서울대 교수, 통일부 장관 2회, 국무총리, 집권 여당 대표를 지낸 화려한 경력과 함께, 그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만든 산파이기 때문입니다.
노태우 대통령께서 취임 후 새로운 통일정책 수립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시며, 이제는 냉전의 시대도 끝났으니 이 시대에 맞는 통일방안을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 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특히 통일방안이라는 것이 행정부만의 일이 아닌 국회와의 공조가 매우 중요한 작업인 만큼 이 장관이 야당의 3김 총재와 상의해서 4당이 합의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술로 본 통일정책사> 이홍구 편/통일연구원 2017년 11월)
노태우 "야당 3김 총재와 상의, 합의할 수 있는 방안 만들라" 지시
1988년 2월에 노태우정부 출범과 함께 통일부(당시는 국토통일원) 장관이 된 이홍구 전 총리는 노 대통령으로부터 통일방안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받는데, "야당의 3김 총재와 상의해서"라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통일방안이라는 것이 행정부만의 일이 아닌 국회와의 공조가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는 노 대통령의 철학 때문일 수도 있고, 국회 권력 구조가 김대중(DJ) 총재의 평화민주당, 김영삼(YS) 총재의 통일민주당, 김종필(JP) 총재의 신민주공화당이 노 대통령의 민주정의당을 압도한 여소야대라는 현실적 상황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을 수도 있으나, 어쨌든 이 전 총리는 이 지시를 성실하게 이행합니다."
통일에 대한 열기가 높던 그때 생긴 많은 통일단체들에는 자신들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이들의 의견을 경청했으며, 우리 통일원이 내놓은 '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함께 통일방안에 대한 공청회를 여러 달에 걸쳐 열었습니다. 이렇게 통일방안에 대한 국민의 의지를 모으려 애쓴 후 3당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총재의 합의에 의해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나오게 되었습니다.(<구술로 본 통일정책사>)
당시 정부는 250회가 넘은 세미나와 간담회를 개최하고, 426건의 통일 논의를 취합·분석했으며, 전문가 등 전 국민 1만6000여 명 대상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이런 준비와 노력 끝에 3김이 '합의'하는 통일방안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다 좋다고 동의했던 통일방안, 결국 30년 끌고 가는 힘의 주인공 됐다"
1989년 9월 정기국회에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정식으로 제출되었습니다.…국회는 정부가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출하던 날 오후 2시에 열리는데, 1시 반에 의장실로 4당 대표를 호출하셨습니다.…김재순 국회의장, 부의장인 윤길중 민정당 대표, 김재광 부의장, YS, DJ, JP, 이렇게 여섯 분이 원탁에 둘러앉은 후 의장께서 제게 마지막으로 10분 동안 통일방안의 요점을 추려 이야기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내가 요점정리를 끝내고 나니 김 의장께서는 각 당 총재께 한 분씩 돌아가며 동의 여부를 물었고 또 모두로부터 좋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둘러앉아서 다 좋다고 동의했던 통일방안이 결국 30년 끌고 가는 힘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구술로 본 통일정책사>)
이렇게 야 3당은 물론 재야 민주화세력의 의견까지 망라해서 만든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1989년 9월 11일 노태우 대통령이 국회에서 발표했습니다. 여기에 합의했던 야당 총재들, 즉 노 대통령의 뒤를 이은 김영삼 대통령이 이를 일부 보완해 1994년 광복절에 '민족공동체통일방안'으로 발표했고, 그 다음 김대중 대통령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개별 정부만의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공식 통일방안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국회가 각계의견을 수렴하고 합의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30년이 넘게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당시 국회 통일정책특별위원장이었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2009년, 민족공동체통일방안 20주년 기념토론회에서 "여야 4당 간의 진지한 토론과 진보·중립·보수 세력의 입장 수렴 등을 거쳤다"면서 "북한의 실체를 인정한 가운데 분단종식을 위한 현실적이고 실천적 방향을 제시했고, 이후 3대에 걸친 정권을 거치면서도 그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고 평가했을 정도입니다.
30년이 훌쩍 지난 현재, 윤석열정부가 새로운 통일방안을 만들고 있습니다. 윤 정부 인수위원회는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발전적 보완"을 국정과제의 하나로 제시했습니다. 지난해 말에 발표하려 했으나,완료하지는 못했습니다. 남북관계가 극도로 악화하면서 급기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통일 폐기를 공식화하는 상황 변동 요인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대통령실 "현 통일방안에 자유주의적 철학 비전" 누락 주장
그러다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기미독립선언의 뿌리에는 당시 세계사의 큰 흐름인 '자유주의'가 있었다"며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통일"이라고 말한 뒤, 용산 대통령실은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자유주의적 철학 비전이 누락됐다며 '새로운 통일관' 마련에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통일부는 8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자유주의 철학을 반영한 '새 통일구상'을 마련하겠다고 보고하고 이어 13일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자유주의 철학을 반영한 새 통일담론 수립을 위한 폭넓은 의견수렴"을 목적으로 '제1차 수요포럼'을 개최하는 등 '여론수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잠정적인 발표 목표 시점은 올해 8.15 광복절입니다.
요약하면, 윤석열정부의 핵심 가치인 자유주의 철학·비전을 통일방안에 반영하겠다는 겁니다.
35년 전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수립 작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정 발표 목표 시점인 광복절까지 다섯 달도 안 남았지만, 현재 논의 수준은 현 정부와 그 지지세력 내 논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야간 진지한 토론과 진보·중립·보수 세력의 입장 수렴 등을 거쳤다"(박관용 전 국회의장)는 1989년 상황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현재 여야는 물론이고 시민사회까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정치구도 에서, 특히 통일·남북관계 분야에서 가장 날카롭게 맞서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의 북진'이 핵심인 통일방안에 합의점을 찾기는 난망해 보입니다.
내용적으로도, 대통령실 등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헌법 4조의 내용이 현재의 형식적인 3단계(화해·협력-남북연합-통일국가 완성) 통일방안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평화재단(이사장 법륜스님)은 이에 대해 헌법 영문판은 이 대목을 'the free and democratic order'라고 명시했다며 헌법에 규정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특정한 정치체제가 아닌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다양한 체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고 반론합니다.
극단적 대립하는 정치구도, 소모적 국론분열 초래 가능성 높아
본격 논의가 시작된다면 논란거리는 이뿐만이 아닐 겁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수준이 될 논란들을 현 정부의 국책 연구기관 등의 논의로 정리해서 국민적 합의로 연결시켜 낼 수 있을까요?
정부의 뜻이 기존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보완하려는 것인지 아예 수정하는 것인지는 아직은 불투명합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윤석열정부의 통일구상이나 통일관(觀) 발표는 될 수 있어도, 기존통일방안을 대체하는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통일방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국론 분열만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우리는 해당 정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다 끝난 이명박정부의 통일항아리와 박근혜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를 보지 않았습니까.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