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영화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개봉작을 볼 수 있는 멀티플렉스는 곳곳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가 아닌 영화관은 하나둘 자취를 감춰 전국적으로 소멸 직전에 이른 상태입니다. 영화관 소멸, 단순히 ‘추억 속 극장이 사라졌다’로 치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산업화에 매몰된 한국영화계의 현주소와 그로 인한 각종 폐단이 ‘영화관 소멸’이라는 하나의 현상 안에 응축돼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영화계가 보내는 위기 신호, 영화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영화관은 영화를 관람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 멀티플렉스(multiplex)는 더 이상 영화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쇼핑하고, 식사하고, 여가를 즐기는 ‘원소스멀티유즈(one source multi-use)’ 개념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관객 입장에선 나쁠 게 없어 보입니다. 다양성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 영화 발전’ 측면에서 보면 분명 폐단입니다. 영화관이 영화 상영에 집중하지 않는 이유, 상영할 영화가 없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영을 기다리는 영화가 수 백 편에 이르지만 영화계를 파고든 자본의 수직계열화 시스템으로 인해 완성된 영화는 상영관이 아닌 창고로 직행해 버리기도 합니다.
급기야 멀티플렉스가 아닌 단관 극장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 사태에 이르고 있습니다. 멀티플렉스로 대변하는 영화관의 화려한 변신이 정작 한국 영화계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영화관에서 클라이밍하는 시대
‘코로나19’로 전 세계 상영업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국내 극장 사업자들은 생존을 위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체험’을 더한 복합공간으로서의 재구성입니다.
CJ CGV(079160)는
2022년 실내 클라이밍을 도입한
‘피커스
’(PEAKERS)를
CGV 피카디리점에서 선보인 뒤 구로점과 신촌아트레온점으로 확대했습니다
. 롯데시네마는 월드타워점에서 체험형 전시관인
‘랜덤 스퀘어
’를 운영 중이고
, 메가박스는 성수점
5관을 개조해 팝업스토어 일종인
‘메타 그라운드
’를 오픈했습니다
.
CGV 신촌아트레온점 '피커스존'. 사진=CGV
기존 상영관을 이용한 콘텐츠 다각화도 꾀했습니다. 아이돌 그룹 공연을 실황 중계하는 콘텐츠를 앞다퉈 상영 라인업에 포함시켰는데, BTS를 포함 임영웅 김호중 등 트로트 스타 공연 실황이 효자 노릇을 했습니다. e-스포츠 경기 중계도 극장가 최고 인기 상영 콘텐츠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제 영화관에선 영화만 보지 않습니다. 관객 입장에선 영화관 이용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속사정을 아는 영화계 관계자들은 극장의 화려한 변신을 마냥 좋게 보지는 않습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극장이 영화 상영을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공간 활용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 영화 산업의 위기 신호”라 말합니다.
코로나19 시기 이전과 이후 촬영이 완료됐지만 개봉을 하지 못하다가 최근 개봉일정을 조율 중인 영화 '그녀가 죽었다' '설계자' '원더랜드'
창고 영화만도 200편 이상
한국 영화의 위기라는 말까지 나온 이유는 현재 완성된 상태임에도 개봉하지 못해 창고에 쌓여 있는 영화가 수 백 편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국내
5개 투자 배급사
(CJ ENM(035760), 롯데컬처웍스
, 쇼박스(086980), NEW(160550),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의 개봉 못 한 영화는 어림잡아도
100편이 넘는 수준입니다
. 이 관계자는
“영화 시장이 좋지 않아 제작된 영화 투자비 회수를 할 수 없다 판단해 개봉을 안하는 것
”이라며
“투자 배급 상영을 쥔 기업 자본의 수직계열화 시스템이 이미 만들어진 영화의 개봉을 미루면서 상영 시장 위축을 오히려 가속화시키고 있다
”고 말했습니다
.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났던 여러 제작사 관계자들은 “2023년 현재 영화가 완성되고도 개봉 못 한 작품이 200편이 넘는다”며 “지금은 영화 제작과 흥행 문제가 아니라 상영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며 탄식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단관 극장이 잇따라 폐관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입니다. 자본을 투자한 대기업 수직계열화 체제에서 제작이 완료된 상품의 출고를 묶어두니 유통(배급) 시장에서 영세업자(단관 극장)는 판매할 상품이 없어 문을 닫게 되는 구조가 형성되는 겁니다. 하지만 같은 극장이라 하더라도 멀티플렉스는 시장 구조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탄탄한 기업의 수직계열화 안에 안착해 있는 데다 공간 사업자로서의 변신을 꾀해 ‘버티기 작전’으로 시장 활성화를 기다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투자금 회수 가능성이 가장 높게 책정돼 국내 스크린 상영점유율 80%를 넘어선 '범죄도시4'.
투자 회수 개념으로 전락한 한국 영화
상영 시장의 97%가량을 점유한 대기업 수직계열화, 즉 멀티플렉스의 독과점은 결국 ‘돈 되는 영화’와 ‘묵혀도 되는 영화’로 상품을 구분해 상영 시장 흐름까지 주도하는 중입니다. 일례로 ‘돈 되는 영화’인 ‘범죄도시4’는 지난달 24일 개봉 후 85%가 넘는 상영 점유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영화계에 오랫동안 몸담아 온 한 관계자는 “관객들의 소비 성향을 멀티플렉스가 강제로 이끌어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며 “멀티플렉스가 공간 활용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은 극장이라는 공간의 본질적 개념 자체를 희석시키는 상당히 위험한 시도”라 말했습니다.
이어 “개봉 못 한 ‘창고 영화’가 넘치는데도 극장이 영화를 버리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은 바꿔 말하면 한국 영화 상품 가치가 유통 시장에서 ‘투자 회수’ 개념으로만 해석되는 것”이라며 “문화 산업이 이런 방향성을 띠게 되면 한국 영화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돈 되는 영화만이 넘쳐나는 획일화를 띠게 될 것”이라 우려했습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