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효진 기자] "도둑질하다 또 들켜도 별로 지장이 없으니 계속 도둑질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둑질로 인생이 망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도둑질을 안 할 텐데요"
국내 굴지의 금융지주 신한금융그룹의 신한카드와 5년째 기술분쟁을 이어오고 있는 핀테크기업 팍스모네의 홍성남 대표는 "대기업들은 소송을 하는 동안 우리 같은 작은 기업이 겁먹고 포기하길 바라는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중소기업 기술보호를 위해 관련 법과 제도가 정비되고 있지만 중소기업·스타트업을 상대로 한 대기업의 기술탈취는 여전합니다. 정부부처나 국회 등 중재기구를 통해 합의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으나 결국 소송을 택하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대기업을 상대로 벌이는 소송은 중소기업에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유되는데요. 수년을 걸친 특허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남은 것은 상처뿐인 영광입니다.
신한카드 마이송금서비스(신한카드 앱 갈무리)
앞선 팍스모네의 경우만 해도 신한카드와 분쟁을 거치며 큰 고초를 겪었습니다. 팍스모네는 지난 2007년 11월 신한카드의 '마이송금 서비스'보다 먼저 '금융거래방법과 금융거래시스템'의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이는 신용카드간 P2P(이용자끼리 직접 데이터를 주고받는 방식) 지급결제 구조를 통해 통장 잔고 없이 신용카드로 상대방 카드로 이체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다만 특허권 출원 당시 이른바 '카드깡(신용카드를 이용한 현금화)'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금융당국이 서비스 불허 결정을 내렸고, 팍스모네가 이를 사업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사이 신한카드가 유사한 구조의 마이송금서비스를 선보였습니다. 마이송금서비스 역시 계좌에 잔액 없이 신용카드로 개인 간 송금이 가능합니다. 신한카드는 팍스모네를 상대로 특허무효소송을 제기했고, 2심 특허법원은 팍스모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신한카드는 이에 불복해 현재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홍 대표는 6년에 달하는 긴 소송을 치르며 지칠대로 지쳤습니다. 그는 "기술침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경제적 중범죄이고 철저히 응징된다는 사회적 컨센서스가 조성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신한카드는 중기부 중소기업기술분쟁조정중재위원회를 통해서 조정권고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회도 중재에 나섰으나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홍 대표는 "특허 침해에 대한 법적·사회적 징벌이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대법원 판결이 언제 날지 알 수 없다"며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2022년 중기부가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총 5년간 중기·스타트업의 기술침해 피해 건수는 총 280건, 총 피해액은 2827억원으로 파악됐습니다. 피해는 느는데 중기·스타트업의 패소율은 2018년 50%에서 2021년 75%까지 지속적으로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은 특허심판 및 소송에서 침해 사실과 손해액 산정에 대한 증거 대부분을 대기업이 보유하고 있어 침해 입증이 쉽지 않다고 분석했습니다.
MOU 후 유사한 서비스 출시…뒤늦게 인지
교육 스타트업 텐덤의 사정도 팍스모네와 다르지 않습니다. 텐덤은 지난 2016년 5월 대학 리뷰 서비스 '애드캠퍼스'를 출시했습니다. 2018년 진학사와 대학 리뷰 데이터와 API(애플리케이션 인터페이스) 등을 골자로 한 업무협약(MOU)를 체결했습니다. 다음 해 4월, 진학사는 애드캠퍼스와 유사한 '캠퍼스리뷰'를 론칭했고, 8개월이 지난 12월 유원일 텐덤 대표가 이를 뒤늦게 인지하면서 법정 공방이 시작됐습니다.
2022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의 1심 판결은 진학사가 승소했으나, 2023년 서울고등법원은 2심 판결에서 진학사가 텐덤의 성과물인 리뷰 데이터와 API를 사용해 캠퍼스리뷰 서비스를 개발한 것을 부정경쟁행위로 인정했습니다. 텐덤의 손을 들어준 겁니다. 서울고법은 진학사가 텐덤에 2000만원의 손해배상액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유 대표는 "배상금액은 적어도 명예를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면서도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싸워 버티는 게 힘들고, 폐업을 하면 재판을 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소송에서 손해배상액을 늘리는 것보다 소송에 안 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2019년 4월 출시된 진학사의 '캠퍼스리뷰'(왼)와 2016년 5월 출시된 텐덤의 '애드캠퍼스'(오)의 화면. (사진=뉴스토마토)
핵심기술 담긴 영상 건네자 특허 출원
지난 2016년 6월 태국 현지법인과 공동으로 천연 마스크팩용 생사 비단 시트 생산기술을 개발한 퀀텀은 그해 7월 국내 마스크팩 시트 시장 1위 업체 피앤씨랩스와 독점공급 협약을 맺었습니다. 피앤씨랩스는 이듬해 퀀텀에 비단 시트 생산 공정이 담긴 비디오 전송을 요구했습니다. 업계 선두 업체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던 퀀텀은 3회에 걸쳐 영상을 전달했습니다. 비단 시트 생산 공정은 타 업체와 구별되는, 회사의 전부와도 같은 핵심기술이었습니다. 2018년 10월 피앤씨랩스는 퀀텀에 계약 해지를 알린 후 다음 달인 11월 생사 비단 시트와 관련한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기술 자료를 유용한 피앤씨랩스의 불법행위를 인정했으나, 그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해선 퀀텀이 특허를 출원한 행위 자체는 손해로 볼 수 없다고 판결, 손해배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피앤씨랩스의 불법을 확인하고도 회사 경영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태일 퀀텀 대표는 "투자금에 재고까지 합치면 총 22억원 정도 손해를 봤고, 새로운 계약으로 사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중소기업이 재판까지 가면 이겨도 남는 건 명예뿐 실익이 없는 상황입니다. 부정경쟁방지법, 상생협력법, 특허법 등에서는 기술 탈취 행위에 대해 피해액의 최대 3배까지 배상하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규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 기회를 날려버린 기업 입장에선 솜방망이 처벌에 불과합니다.
이효진 기자 dawnj789@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