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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협약으론 역부족…디스커버리법 등 근본 해결책 필요
대-중기 기술분쟁 '상생협약'으로 일단락…손해배상 기준도 헐거워
입력 : 2024-06-05 오전 6:00:00
[뉴스토마토 이효진 기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협약이 이어지고 있지만 중소기업에겐 고육지책에 불과합니다. 대기업에 비해 자본과 인력 등이 현저하게 열악한 중소기업으로선 대기업과 정부부처 등이 내미는 상생협약안이 충분치 않아도 사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상생협약보다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침해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지적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중소기업인대회에 참석했다.(사진=연합뉴스)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은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2022년 '대·중소기업 상생 특별위원회'를 꾸리며 대·중소기업간 상생생태계 조성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후 상생협약과 같은 분쟁해결제도(ADR)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기술탈취 해결 방안으로 떠올랐습니다. 지난해 11월 정부 여당이 마련한 '대기업-스타트업 상생협약식', 중소벤처기업부의 '상생합의' 등 종류와 명칭은 다양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기술분쟁을 소송과 보상 없이 '상생'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상생협약을 체결하는 기업들은 △기술 찬탈 금지 △상생 △비방 금지 등을 상호합의하게 됩니다.
 
기술 찬탈 금지·상생 약속 '현실적' 타협에 불과
 
중소기업은 여건상 법률 관련 전담 인력을 두기 어렵고, 소송비용 또한 부담이어서 대기업과 싸울 일 없이 경영에 전념할 수 있는 상생협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기업 역시 중소기업과 상생한다는 우호적 이미지를 쌓을 수 있다는 유인이 있습니다.
 
중소기업 기술분쟁 사건을 주로 맡아 온 박희경 재단법인 경청 변호사는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해서때 이기기는 매우 어렵다"며 "또 분쟁 중인 기업엔 투자가 잘 안 들어오는 등 다른 문제도 많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중소기업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법정 소송보다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해 상생협약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상생협약 자체가 기술탈취·분쟁의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실제로 대기업과 상생협약을 체결한 A사 대표는 "각자 서비스를 존중하고 선의의 경쟁을 한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상생협약에 이르기 전의 피해액은 보상 받지 못한다"며 "우리는 운 좋게 분쟁을 빨리 마무리했지만 일반적으로 상생협약을 맺는 것이 쉽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상생협약 내용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협약에 포함돼 있는 상호비방금지 조항 때문에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습니다.
 
중소기업 입장에서 ADR은 기술침해 입증 책임, 소송비용 등 부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대안이지만 결국 합의에 실패하고 소송까지 가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다만 기술침해 입증이 쉽지 않다 보니 피해를 입어도 별도의 조치를 하지 않는 기업이 부지기수입니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 발표에 따르면, 최근 3년간 특허 출원 경험이 있는 중소기업 300곳 가운데 10.7%가 '기술탈취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기술탈취 피해 경험이 있는 업체 중 43.8%는 '별도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나 중기부, 특허청 등 행정기관에 신고하거나 수사기관에 수사 의뢰했다는 응답은 28.1%, 손해배상 청구 등 법적 대응은 21.9%에 불과했습니다. 별도 조치를 하지 않은 이유는 '기술탈취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78.6%로 압도적이었습니다.
 
분쟁 과정서 손해배상 기준액·배수 상향 분위기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탈취와 관련해 국회와 정부가 마련한 제도는 대부분 분쟁 이후 손해배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대기업의 기술 탈취 행위에 대해 피해액의 최대 3배까지 배상토록 하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이 지난 2022년 국무회의를 통과해 시행됐습니다. 개정된 상생협력법은 하도급법·특허법·부정경쟁방지법 외에도 수탁·위탁거래에서 발생한 중소기업의 기술자료 유용행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규정이 담겼습니다. 
 
하지만 이 법도 기술탈취 피해액의 기준금액 조정 없이 배수만 높여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잇따릅니다. 피해기업은 대부분 사업 초기 단계라서 피해액의 근거가 되는 매출이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중기부 관계자는 "기술개발에 들어가는 비용도 피해액으로 포함해 기준금액 자체를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지난 국회에서는 피해액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증거 확보에 강제력을 두어 대기업의 소송 문턱을 높이는 법안도 발의된 바 있습니다. '특허법 일부개정법률안', 일명 '한국판 디스커버리법'입니다. 이 법은 기술 분쟁 관련 자료와 증거 등을 양측이 전부 공개한 상태에서 해당 자료에 대해서만 재판을 진행한다는 규정과 함께 합리적 이유 없이 서류 제출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 법이 시행될 경우 특허침해소송의 증거가 편재된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해 분쟁 해결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됐습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산업통산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반도체 등 국가 핵심기술 생산현장에서 기술이 유출될 수도 있다는 지적을 받았고, 결국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됐습니다.
 
K-디스커버리법을 대표 발의했던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의원은 "소송에 가도 승소하기 어려우니 법적 대응을 포기해 버리는 중소기업들이 많다"며 "기술탈취 입증이 좀 더 쉬워지면 기업 이미지 실추를 두려워 하는 대기업들이 소송을 거는 일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기술탈취 방지의 핵심은 대기업이 소송까지 가는 절차를 부담스럽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소기업 관련 연구원은 "배수를 높이고 손해배상액을 높여도, 중소기업은 소송기간을 못버티기 때문에 대기업은 소송으로 가도 손해가 없다는 인식이 있다"면서 "대기업이 중소기업 기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효진 기자 dawnj789@etomato.com
이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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