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1일부터 27일까지 ‘독립’이란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중국 동북3성 독립전쟁 사적지 답사에 일행 31명과 함께 참여했다. 답사 일정의 하나로 지린성 서남부 압록강 북안 삼원보에 있는 신흥무관학교 터를 찾았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한테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자 선각자들이 독립전쟁을 결심하고 필요한 인력을 기른 군사교육 기관이다. 우당 이회영을 비롯한 지사들은 한인들이 이주한 서간도에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신흥강습소는 장교 인력을 길러내는 6개월 정규반과 부사관을 양성하는 속성반을 두었다. 졸업생은 한인촌 교사가 되거나, 독립군 대원이 되거나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3가지 진로를 택했다. 한인촌 교사는 낮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청년을 모아 군사훈련을 지도했다. 나중에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꾼 이 교육기관은 1911년부터 1920년 문을 닫을 때까지 3천5백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들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1920년대 독립전쟁의 주력으로 참여했다.
신흥무관학교 터를 찾아가는 여정은 조금 힘들었다. 마침 중국 동북지역에 큰비가 내리는 바람에 하얼빈에서 장춘으로 가는 고속철도 예매편이 취소됐다. 시간이 2배 걸리는 일반 열차로 표를 바꿔 장춘으로 향했고, 장춘에서 버스로 3시간30분 달려 저녁 어두워질 무렵에야 부근에 이르렀다.
목적지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휴게소에서였다. 중국 공안원(경찰관)이 대기하고 있다가 인솔자한테 방문 목적 등을 꼬치꼬치 물었다. 신흥무관학교 터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장대비가 쏟아져 목적지로 뻗은 개울 옆 좁은 길이 진창이 되어 있었다. 공안원은 신발이 흙에 엉망이 될 텐데 굳이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며 발걸음을 돌려주기를 은근히 종용했다.
선각자들은 서간도 험한 땅을 찾아가 독립전쟁 기지를 건설했는데, 신발이 흙탕물에 젖는 게 대수이겠는가. 우리는 개울 옆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옛터에는 중국인 농가가 들어서 있었다. 당시 건물이 그대로 보존된 것은 아니지만 학교를 세웠던 터를 확인했다. 학생들이 전투 훈련을 하느라 쌓았던 부근 야산 진지는, 주민들이 돌덩이를 다른 용도로 옮겨 쓴 바람에 흔적이 사라졌다는 설명을 들었다.
안타까운 점은 신흥무관학교 터에 안내판이나 표지석은커녕 작은 나무 팻말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전쟁의 대표적인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 의거 현장이나 해림시의 김좌진 기념관, 용정 윤동주 시인 생가와 같은 동북지역 다른 사적지와 비교해도 의미가 뒤지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된 건가.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자국 동북지역 소수 민족 활동으로, 중국 역사의 일부로 기록하고 있다. 이른바 동북공정을 추진해 한국과 역사 갈등을 빚었다.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우리 독립전쟁 사적은 중국이 자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할 대상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한국과 중국 국민이 함께 싸웠던 시절을 말해주는 증거물이다. 한중 두 나라가 나란히 기려야 할 역사로 볼 수 있다. 동북공정과 정반대다.
그런데 왜, 신흥무관학교 터는 유난히 초라한 꼴로 남아 있나? 어쩌다가 중국인 시골 공안원이 한국 답사단을 졸졸 미행하며 동향을 살피는 지경까지 오게 됐나?
한국 학계와 기념사업단체들이 그동안 관심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음을 일차로 꼽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우리 정부가 중국 당국을 설득하면 좋은데, 윤석열 정부 들어 한중 관계를 잘못 관리해 그것도 어려운 상태다. 안타까웠다.
박창식 전 국방홍보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