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은 '니시미카와긴잔'(西三川砂金山)과 '아이카와쓰루시긴긴잔'(相川鶴子金銀山) 등 2개로 구성돼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12일 니가타현 사도에 있는 사도광산의 상징적 채굴터인 아이카와쓰루시긴긴잔의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 모습. (사진=뉴시스)
2015년 7월 5일 독일 본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39차 회의. 일본이 신청한 나가사키현 군함도(하시마) 등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심의하는 이 자리에서 일본 측 사토 구니 유네스코 대사는 당시 조선인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against ther will) 동원되어 △가혹한 조건(undernarsh condition)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했다면서, 방문객 등에게 이를 알리는 인포메이션 센터를 설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이 사실상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을 인정한 겁니다. 이를 인정해야만 군함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찬성하겠다는 당시 박근혜정부의 요구를 일본이 수용한 건데요. 이렇게 해서 군함도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됩니다.
'강제동원'인정, 바로 다음날 외상이 뒤집어…2021년 일본 각의에서 '강제동원' 부정 결정까지
그러나 여기까지였습니다. 바로 그다음 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현 일본 총리)이 사토 구니 대사의 발언을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부인해 버린 겁니다.
군함도에 대해 알리는 '산업유산 정보센터'는 그로부터 5년 뒤인 2020년 문을 열었으나, 강제동원이 아니라 오히려 군함도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왜곡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센터 위치도 군함도가 아니라 도쿄 신주쿠였습니다.
급기야 2021년 4월 일본 각의(국무회의)는 "국민징용령에 의한 한반도 출신 노동자에 대해 '강제연행', '강제노동'이란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결정했고 그 이후 일본 교과서에서 관련 표현이 사라졌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그해 7월 도쿄의 '산업유산 정보센터'를 실사한 뒤 일본 정부에 개선을 촉구하는 결정문을 채택하고 개선방침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각의 결정까지 한 일본 정부에게는 '택도 없는' 소리였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보고서에 “강제 동원과 가혹한 조건에서의 노역은 없었다”고 했으니, 가히 '군함도 먹튀'입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올해 7월, 윤석열정부는 군함도처럼 조선인 1500여 명이 강제노동을 당한 흑역사가 새겨져 있는 일본 니카타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동의해 줬습니다.
일본이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가 기록된 전시물을 설치하겠다고 한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강제동원'은 기록되지 않았고, 주로 열악한 노동조건 담았습니다. 식민지 강제동원 문제가 아니라 근로환경 문제로 축소해버린 겁니다. 박물관 위치 자체도 사도광산과는 2km 떨어진 인적 드문 외진 곳입니다. 군함도 등재상황과 이렇게 똑같을까요?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 등 제국주의 시절 일본의 국내법에 근거해 자국민을 징용한 것이기 때문에 합법이라는 논리가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 광산 소재 '니가타일보' "윤석열 정권이 아니면 합의할 수 없었다"
일본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신문'은 이번 등재를 둘러싼 한일 정부 간 물밑 협상과 관련해 "일본이 강제노동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현지에 상설 전시를 하고 한반도 출신 노동자가 1천500명인 것과 노동환경이 가혹했다는 점을 소개하는 방안 등을 타진해 한국이 최종적으로 수용했다"고 했고. 사도 광산 소재 니가타현의 최대 일간지 <니가타일보>는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가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양국 관계가 급속히 개선됐다. 윤석열 정권이 아니면 합의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한국 외교부는 <요미우리신문> 보도가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할 뿐 강제노동 표현을 분명하게 넣으라고 요구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의미를 상실한 '2015년 사토 구니 발언'만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사도 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서 방문객이 조선인 노동 관련 전시를 보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일본이) 현장에 설치한 전시물은 물론 추도식 등 관련 후속조치 이행에 있어서도 우리 정부와 긴밀히 소통하며 진정성 있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기를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2015년 군함도 등재 때 외교부 2차관으로 당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조 장관의 발언이 이렇습니다.
지난해 3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배상 문제에 대해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면서 당시 박진 외교부 장관이 "물컵에 절반 이상이 찼다.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서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한 '물컵론'의 재판입니다.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 등재 전에 선제적으로 조선인 노동자 전시실을 여는 등 선(先) 조치를 했다. 등재 전에 일본 측의 행동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통령실은 더합니다. '강제동원 명시'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일제강점기 징용·위안부 동원 강제성 부정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장'
군함도 때는 일본이 약속을 어겼다고 비판하면서 국제사회를 통해 압박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윤석열정부가 면죄부를 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대못을 박은 겁니다.
문재인정부에서 외교부1차관을 지낸 최종건 연세대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은 물론이고 외교 장관, 이번 건 주무차관인 외교 2차관(강인선), 안보실장(조태용), 안보실 1차장(김태효)의 이름은 분명히 역사에 오명으로 남을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윤석열정부는 왜 이렇게 일본에 대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일까요?
윤 대통령은 지난달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에 일제강점기 징용과 위안부 동원에 대한 강제성을 부정하고, 독도가 한국 영토라고 볼 학술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김낙년 동국대 명예교수를 임명했습니다. 다른 기관도 아닌 ‘한국학의 본산’이라는 연구원장 자리인데, 말입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