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법안 거부권(재의 요구권)을 독재적인 제도라고 볼 수는 없다. 안건을 막아서는 것이지 통과시키는 것은 아니다. 법안 통째를 놓고 판단할 뿐 내용 일부만 골라낼 수는 없다. 대통령이 재의를 요구해도 2/3 이상의 의원이 찬성하면 법안이 통과된다. 다만 재의 요구가 거듭될수록 대통령과 국회 다수파의 갈등은 커지고, 양측이 서로를 억누르는 바람에 되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는 상태가 된다. 지금의 한국 정치처럼 말이다. 야권이 압승한 총선 이후 대통령 법안 거부권이 더욱 남발되면서 ‘이러려고 투표를 했나’ 하는 자괴감이 확산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밀고 당기는 협상과 치열하고 섬세한 절충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정치인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를 심화시킨 촉매제일지언정 근본 원인은 아니다. 법안 거부권 행사가 전무했던 김영삼·김대중·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대통령이 반대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작았다. 김영삼 정부는 임기 중반 짧게만 여소야대를 경험했다. 문재인 정부 전반기는 여소야대였지만 제1야당이 단독으로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적은 없다. 김대중 정부 시기 제1야당이 단독 과반을 점유한 기간은 첫 6개월과 마지막 3개월 정도였다. 윤석열 정부는 임기 전부를 제1야당이 단독 과반인 구도에서 보내는 처지다.
대통령제는 여소야대가 될 여지를 크게 열어둔 체제다. 여기에 양당제까지 공고해지면 ‘제1야당 단독 과반’의 가능성과 대통령의 법안 거부권 의존이 모두 극대화된다. 법안 거부권 남발은 대통령제의 ‘일탈’이 아니라 ‘극한’이자 ‘본연’이다. 법안 거부권 남발을 막고자 한다면 대통령제 청산을 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서 정부 체제의 전환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거대양당 강성 지지층은 서로 질세라 “의원내각제는 저쪽 당의 음모”라고 단언해 왔다. 국민의힘은 대선보다 총선이 더 버겁다는 것을 절감했기에(대선에선 영남에서 크게 이기는 것이 주효하지만, 소선거구제인 총선은 수도권에서 근소하게 져도 타격이 크다) 의원내각제로부터 더 뒷걸음질 칠 것이다. 총선에서 대승한 더불어민주당도 의원내각제를 할 자신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윤석열이고 여당이 국민의힘이라서 거둔 승리였다. 총선이 곧 대선인 체제에서는 대통령제에서의 반사이득, ‘야당 프리미엄’이 없다.
현 국면이 끊임 없이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차기 대선과 총선은 각각 2027년과 2028년에 열린다. 그 다음에는 2032년 3월에 대선, 4월에 총선이다. 총선과 대선이 붙어 있을수록 여당과 국회 다수파가 일치할 공산이 커진다. 아마 2028년부터 2036년까지는 법안 거부권 남발이 멎을 것이다. 그 다음은? 다시 국회와 대통령의 임기는 점점 더 엇갈리고, 제1야당이 국회 다수파가 되면 대통령 법안 거부권은 또 남발될 것이다. 1987년에 정해진 체제와 시간표를 변경할 능력이 없는 한국 정치는, 그저 세월에 실린 채 그때그때를 살아갈 뿐이다.
요즘 시중에 도는 말대로 현 대통령 임기를 2026년에 마감하고 대통령 4년 중임제를 도입한다면? 법안 거부권 남발은 ‘정착’된다. 미국에서 여러 번 나타났듯, 2년마다 대선과 총선이 번갈아 찾아온다면 대통령 임기 중간의 총선은 정권 심판 심리에 의해 약속한 듯 여소야대로 귀결된다. 최소한 대통령 임기 후반기는 법안 거부권 행사로 점철되는 것이다. 법안 거부권 남발을 비난하던 야당 인사가 대통령이 되어 법안 거부권을 남발하는 날도 올 것이다.
김수민 정치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