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먼저 이런 가정을 해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방일영장학회를 노무현·김대중 대통령이 빼앗아 노무현장학회, 김대중장학회로 바꾼다면? 그것도 방일영씨 일가를 잡아서 가둬놓고 조선일보, 주간조선, 월간조건, TV조선을 빼앗아 갔다면?
그 뒤로 시간이 흘러서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집권세력은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단순히 시효가 지났다고 노무현 것, 김대중 것이라고 넘겨짚을까 아니면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했을까?
◇사건본질은 박정희의 언론장악
50년 전 벌어진 정수장학회 강제 헌납사건을 설명할 때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강조한다. ‘장물.’
최근 펴낸 <장물바구니-정수장학회의 진실>에서 한 교수는 “사람을 잡아가 가둬놓고 몸값을 뜯어내는 것은 마적들이 잘하는 인질극”이라며 “박정희 정권이 김지태씨를 잡아와 두 달 동안 가둬놓고 언론사와 땅 10만평을 빼앗아 5·16장학회를 만든 과정은 인질 납치법이 인질을 잡아 몸값을 뜯어내고 풀어준 뒤 그 몸값으로 온갖 호사를 부리다가 자녀들에게 물려준 것과 다를 바 없다”(114쪽)고 썼다.
보통의 인질극과 다른 점은 국가기구가 동원됐다는 점이다.
지난 12일 저녁 서울 종로 평화박물관 사무실에 만난 한 교수는 “이게 사실 복잡한 사건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여러 차례 썼다.
“상대편에 원하는 것 있으니까 잡아다가 몸값 뜯어낸 것이에요. 언론장악을 위한 인질납치극이죠. 당시 박정희가 필요했던 것은 언론이었습니다. 권력을 장악했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대적 언론이 있어서는 안 되고 우호적 언론이 있어야 한단 말이죠. 박정희는 민주적 신념을 갖고 건전한 비판을 하는 그런 언론을 유지할 능력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저 찬양하는 언론이 필요했죠.”
당시 재벌 가운데 언론사를 소유한 건 김지태뿐이었다.
한 교수는 “고인이 언론사를 갖고 있다가 불행한 희생양이 됐다”고 덧붙였다.
◇박근혜의 ‘상식과 원칙’은 어떻게 다른가
책 <장물바구니>에는 박정희가 언론사를 노린 이유, 재산 강탈 과정, 장물이 유족에게 넘어간 과정 등이 상세히 소개돼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지난달 기자회견을 열고 김지태씨를 친일파이자 부정축재자로 공격한 데 대해 별도의 장을 두어 반박하고 있다.
한 교수에 따르면 이는 팩트가 아닐뿐더러 본질을 흐릴 수 있는 주장이다.
이완용이 부정하게 모은 재산이라도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국가가 환수 할 수 있다는 게 한 교수의 생각이다.
한 교수는 박 후보에 대해 “사과하지 않아도 좋다. 반성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그 입은 제발 다물라”고 일갈했다.
“박근혜가 정수장학회에서 수혜와 혜택을 받았다면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해야지 어찌 감히 원주인을 부정축재자, 친일파라고 합니까? 딸로서 아버지를 비판하라고 요구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때 일은 잘못된 거다, 하지만 제게 묻지 말라, 제가 이야기하기 뭣하잖아요, 그때 돌아가신 분들에겐 송구하고 뭐라 드릴 말씀 없다, 변명할 말이 없다’ 그렇게 얘기했다면 기자들이 어떻게 더 물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뭐가 잘못 됐냐’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문제라는 거죠.”
한 교수는 정치적 논란에 대해 "상식과 원칙을 이야기했을 뿐 그 이상의 어젠다는 없다“고 밝혔다.
“공격목표를 껴안고 있으면서 그걸 이야기 한다고 정치적이라고 하면 안되죠. 이걸 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대통령 되면 이런 일 또 일어나지 말란 법 있을까요?”
◇“현대사 다루면 피해자들 피와 눈물과 진물로 제 몸이 축축”
무엇보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적어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원칙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한 교수는 강조했다.
“12살 소녀에게 왜 책임을 지우느냐 지적해요. 좋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를 모욕하는 건 12살 박근혜가 아니라 60대 대선후보 박근혜에요. 그가 상처를 계속 후벼 파는 건데 그건 막고 싶은 거죠. 저런 말 한마디가 저분들에게 어떤 아픔에 몸부림치게 될지 아니까 2차 범죄 막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가 현대사를 주제로 연이어 책을 내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문제 연구하다 보면 피해자들 피와 눈물과 진물로 제 몸이 항상 축축해요. 저 분들 상처에선 계속 진물이 흐르는데 그런 얘기는 상처를 후벼 파는 얘기거든요. 50년 전 일이라도 그게 치유 되겠어요? 다만 상처가 덧나지 않게 조심조심 살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대놓고 소금을 뿌린 거죠. 가해자가 피해자에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장물바구니> 마지막 장 ‘보충’ 편에는 박정희 군부정권의 언론장악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한 교수의 언론기고를 모은 꼭지로, 박정희의 또 다른 장물 경향신문 강제 매각 과정은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한 교수가 보기에 언론을 낚아채고 장악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본질적 습성으로 박정희 군부정권이 그랬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명박 정부 시작하면서 MBC 민영화 이야기가 또 나와요. 하지만 이 상태에서 민영화 했다간 박근혜가 지배주주 되는 것 아닌가, MB도 그 상황 바라지 않아서 시간 끌다가 대선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정수장학회가 공격 받으니까 그걸 팔려다 전모가 드러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올바른 해결책은 뭘까.
“우리 속담에 아무리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고 했기로서니 강도질해서 장학금 주는 건 아니라고 봐요. 그건 받는 사람도 떳떳치 않고 학생들을 모욕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가장 좋은 건 사안 자체가 장물로 시작했으니 재단법인이 해체를 결의하고 그것을 국가에 반납하면 국가는 사회공익법인을 만들 수 있고 유족에게 돌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교수는 “박근혜 후보 기자회견 전에 책이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박정희가 살아나도 꼼짝 못할 만큼 본질은 꼼꼼이 썼다”고 밝혔다.
그는 “공대위 차원에서 박 후보 측에 토론하자고 몇 차례 제안을 했다”며 “아직 답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후보가 정수장학회 문제를 정면돌파 하겠다고요? 정면 돌파하려면 나를 먼저 넘어야 할 겁니다. 하나하나 제기된 의혹에 대해서 책에 썼어요. 제가 이 책 들고 정면에 서 있는데 저한테 연락하지 않고 딴 데 가서 이야기하는 것은 비겁해요.”
◇한홍구 교수는?
1959년생으로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도 맡고 있다. 참여정부에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을 맡아 과거사 진실 규명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국내에선 다소 드문 ‘현대사 연구자’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독립투쟁사 연구’를 통해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 교수의 활동반경은 대학 강의실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후원하고 대체복무제 도입을 주장하며 베트남전 파병을 반성하는 사업에 참여해왔다. 올해 3월부턴 정수장학회 공대위 집행위원장이란 직함을 추가했다.보폭이 넓어도 관심사는 대체로 ‘인권’과 ‘평화’에 수렴되는 모습이다.
집필활동도 활발하다. 이번 <장물바구니>를 포함해 현대사를 소재로 그동안 20여 권 책을 냈고 언론에 기고도 많이 한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 史> 시리즈는 2008년 국방부가 불온서적으로 지정, 부대 안 반입과 유통을 금했던 23권 중 하나에 꼽히는 영예(?)를 누렸다. 현대사에 천착하는 이유에 대해 한 교수는 “피해자의 눈물과 피와 진물을 견디기 어려워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