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어스름하면서도 따스한 빛이 무대에 흐른다. 빛의 발걸음이 가 닿는 곳은 어느 한옥이다. 기둥, 디딤돌, 대청마루 위를 넘실대는 빛을 창호지 문이 묵묵히 안으로 들인다. 문지방을 넘은 빛은 공간 구석구석을 따뜻한 기운으로 채운다.
연극 <3월의 눈>의 한옥무대 풍경은 주인공 노부부 장오와 이순의 무던한 성품과 어쩐지 닮아있다. 한옥의 단정한 매무새를 눈길로 쫓다보면 그제서야 그 공간에서 살고 있는 배우들이 보인다. 기둥 하나, 석까래 하나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묵직한 존재로서 배우들은 그곳에서 '산다'.
2011년 초연된 <3월의 눈>이 지난해에 이어 다시 한 번 올해 백성희장민호극장의 무대에 올랐다. 지난 겨울 유명을 달리한 고(故) 장민호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두루 받은 이 작품은 고인의 유작이 됐다.
유별난 연출도, 뾰족한 갈등도, 격정을 쏟아내는 연기도 없다. 연극은 그저 느릿하게 흘러간다. 실제 삶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은 뜨겁다. 세밀한 감정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극의 밀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잠깐 내리다 금방 녹아 사라지는 3월의 눈 같은 삶, 내 자리를 비워내 줄 때가 언제인지 아는 삶은 서글프면서도 퍽 아름답다.
한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노부부의 삶에 대한 태도는 자칫 따뜻한 사랑 이야기로 비칠 수 있는 이 극에 깊이를 더한다. 한옥은 사업가의 눈에는 값 나가는 고재, 관광객에게는 구경거리이지만 떠돌이 부랑자에게는 휴식처, 장오와 이순에게는 삶 그 자체이다. 노부부가 생사 모르는 운동권 출신 아들 영돈 대신 손주 뒤치다꺼리를 하는 동안 한옥은 이제 없어질 위기에 처한다. 연극은 이처럼 삶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는 사람들, 그리고 말 없이 사라져 가는 존재에 애틋한 시선을 보낸다.
사실주의 연기의 최고봉으로 꼽히던 배우 장민호를 대신해 배우 백성희와 짝을 이룬 이는 배우 변희봉이다. 이번 작품에 임하면서 '연기가 없는 연기를 하는 것'을 가장 중점으로 뒀다는 변희봉은 40여 년의 무대 공백이 무색할 만큼 장민호의 커다란 빈 자리를 듬직하게 채웠다. 이순을 연기하는 백성희는 동동거리는 발걸음과 토라지는 말투로 노년의 사랑스러움을 자연스레 표현한다. 그냥 그곳에 인물로 존재하는 연기, 비우고 버림으로써 채워지는 연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작가 배삼식의 깔끔한 극작술, 연출가 손진책 특유의 고전적인 세련미는 배우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다.
제작 국립극단, 작 배삼식, 연출 손진책, 출연 백성희(더블 캐스팅), 변희봉, 박혜진(더블 캐스팅), 정진각, 박경근, 김효숙, 김현웅, 조주경, 고병택, 이선정, 서제광, 김영진, 무대 박동우, 의상 최보경, 조명 김창기, 작곡 김철환, 한옥제작 조전환, 무대미술협력 및 소품 김수희, 무대감독 신용수, 무대제작 최슬기, 분장 최은주, 23일까지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