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극작가 겸 연출가 정의신의 관심사는 <푸른배 이야기>에서도 여전하다. 주류에서 소외된 사람들, 터전을 잃고 흩어지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정의신 무대의 중심에 선다. 그는 재일교포 출신으로서 '디아스포라(離散)' 상황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숨기지 않는다. 극 말미에 배우 박수영의 입을 빌어 '모두가 잊더라도 나는 그 때 그 곳의 사람들을 기억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독백 대목에서는 모종의 결의까지 느껴진다.
일본작가 야마모토 슈고로의 소설 '아오베카 모노가타리'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 작품은 도시화의 영향으로 흩어진 사람들을 기억의 힘으로 다시 한 데 그러모은다. 무대의 배경은 한국 상황에 맞춰 인천시 남촌도림동으로 옮겼다. 소래길, 남동로, 호구포가 맞닿는 남촌도림동은 송도신도시가 개발되면서 현대 도시로 변모한 지역이다.
연극 <푸른배 이야기>에서 정의신의 이야기는 진실하다. 하지만 사실 새롭지는 않다. 전작을 떠올려 보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야기 자체보다는 연출과 극작의 형식이다.
이 극은 과거를 회상하는 액자식 구성을 택하고 있는데 무대와 언어가 이를 탄탄히 뒷받침한다. 무대 가운데 놓인 너른 평상은 극중 주로 과거의 공간으로 사용되며 액자식 구성을 시각화한다. 배우의 언어는 소설의 화법과 연극의 화법을 오가며 청각적으로 공연의 뼈대를 구축해낸다.
배우의 배역설정 방식도 눈길을 끈다. 극에서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옴니버스 식으로 펼쳐지는데 배우들은 한 배역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여러 배역을 바꾸어가며 소화한다. 극 중 화자인 '나'는 30년 전 남촌도림동에서 3년 정도 머물며 그곳 사람들과 함께 지낸 경험이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통통배 선생'이라 불리는 이 인물의 경우, 무려 배우 4명이 번갈아 가며 역할을 맡는다.
'너'와 '나'의 구별을 이처럼 모호하게 설정한 점은 과거 이 마을이 간직했을 공동체성을 떠올리게 한다. 무대에는 뱃사람의 투박함과 어촌 여자들의 드센 기운이 넘실대지만 이들 모두 천박하다기보다는 순박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 모두 함께 아웅다웅하며 살아간다는 공동체적 삶의 정신이 기저에 깔려 있다. 1인다역의 배역 설정 외에 무대 위 빨랫줄에 가득 걸린 각양각색의 빨래, 평상 뒤에 배경막처럼 걸린 색동 조각보 등도 다양한 개성을 포용했던 과거의 가치를 강조한다.
30년이 흐른 후 '나'가 마을을 다시 찾아갔을 때 기대와는 달리 통통배 선생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옛 사람들을 내뱉어내고 도시화의 길을 걷고 있는 마을은 회색빛 일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은 좌절로 끝을 맺기 보다는 통통배 선생처럼 마을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암시하며 희망의 실마리를 남겨둔다. 과장된 막춤과 욕설 등 극의 일부 유머코드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한결같이 끈질기게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의 힘으로 되살려야 한다'고 설파하는 정의신의 집념에는 결국 수긍할 수 밖에 없다.
작·연출 정의신, 제작 국립극단, 출연 서상원, 박수영, 김문식, 김정영, 송태영, 김민선, 조영우, 이철희, 장정애, 조정문, 이정주, 이현응, 정지은, 심재현, 무대 김수희, 조명 김창기, 음악 김철환, 의상 김지연, 분장 최은주, 안무 김재리, 격투지도 쿠리하라 나오키, 24일까지 국립극단 소극장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