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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힘이 리얼리즘 정신의 핵심"
예술의전당 자유연극시리즈I <만선>
입력 : 2013-05-03 오후 6:53:06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올해 예술의전당 자유연극시리즈 첫 번째 작품으로 천승세의 <만선>이 3일부터 15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오른다.
 
1964년 작인 천승세의 <만선>은 어부들의 소원인 '만선'을 소재로 삼아 하층민들의 삶의 질곡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보편적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본래 연출을 맡기로 한 신호 연출가가 지난해 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김종석 연출가가 대신 맡게 됐다. 김 연출은 이번 공연에서 근대 리얼리즘 명작의 부활을 모토로 내걸었다.
 
본 공연을 앞두고 3일 공개된 <만선>의 전막 리허설에서는 원작의 해체와 재구성 대신 해석의 깊이로 승부를 거는 정공법이 눈에 띄었다.
 
작품은 대각선으로 놓인 난파선 형상의 무대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공연 앞부분과 뒷부분의 경우 무대에 푸른 물결 영상이 투사되면서 다분히 표현주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극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반부에는 오롯이 배우들의 사실주의 연기만으로 승부한다.
 
연출가 김종석과 배우 한명구(곰치 역), 김재건(임재순 역), 황영희(구포댁 역) 등이 작품의 의도와 진행과정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다음은 공연 후 진행된 일문일답.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작품의 의도는?
 
▲(김종석 연출)연극에 대한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이 연극을 만들게 됐다. 곰치와 구포댁, 그 가족들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살아내려고 하는 불굴의 도전, 몸부림들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애초에 토속성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 연극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지만 2013년도 <만선>에서 주목하는 것은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힘, 살기 위한 도전, 삶에서 겪는 상실, 이에 대한 위로에 초점을 맞췄다.
 
곰치는 욕망만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남성상을 대변한다. 우리 시대의 40대 중반 아버지들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다. 40대 중반 남자의 일상성을 염두에 두고 한명구 배우를 캐스팅했다. 구포댁은 생명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들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남자와 여자가 도전상황에 직면해 서로의 입장을 지켜내려 하는 싸움으로 이 작품을 바라봤다. 결과적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구포댁, 곰치, 그 가족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목적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각자 맡은 역할에 대해 설명해달라.
 
▲(한명구 배우)뱃사람 곰치를 맡고 있다. 처음에는 곰치를 무모한 도전과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그런 인간으로 봤다. 그런데 작품을 하다가 그 욕망과 도전이 어디서 왔나 생각해보니 역시 가족을 지키기 위한, 삶을 살아내기 위한 의지에서 오지 않았나 싶다. 이미지 상으로 보면 곰치는 상당히 몸집도 크고, 고집이 센 인물로 그려지지만 내가 역할을 맡으면서 ‘과연 곰치가 그럴까’ 의심해보게 됐다. 곰치는 굉장히 의지가 강한 인물이지만 그 의지는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곰치가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으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울 수 밖에 없는 인물로 승화돼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황영희 배우)곰치의 아내인 구포댁을 맡았다. 이 작품을 하면서 ‘살아내는 게 인생’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지막 장면에 구포댁이 미쳐가는 대목에서 구포댁이 진짜로 미친 게 아니라 미치지 않고서 인생을 살아가기는 힘든 것 아닐까 싶었다. 모두들 각자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상황이 있지 않을까? 작품을 통해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김재건 배우)선주 임재순 역할을 맡고 있다. 모든 사건이 나 때문에 벌어지는 것 아닐까 싶은데, 나는 결코 나쁜 놈이 아니다. 우리 집과 내 인생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피해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연기를 했다. 귀여운 악마로 봐줬으면 한다.
 
-남자와 여자의 대결보다는, 돈의 힘과 무게에 짓눌리는 중년의 모습이 더 크게 보인다.
 
▲(김종석 연출)작품 자체는 빈곤한 사람들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근대의 리얼리즘 연극으로 동시대 관객과 소통할 방법을 찾다가, 이 부부가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서로 다른 두 가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곰치가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구포댁 때문이고, 구포댁의 살아가는 모습은 곰치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연습과정 중에 배우들과 나누기도 했다.
 
-등장인물들은 작품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는데, 작품을 통해 위안을 주려 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김종석 연출)이 시대를 살아내는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자녀인 ‘슬슬’이와 ‘도삼’이가 여기 무대 위에 선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함으로써 마음 속 분노와 억울함을 해소하길 원했다. 사실은 공연팀 내에서 ‘더 절제하자, 모던하게 가자’는 논쟁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정통적인 방법으로, 무대 위 인물들이 관객을 대신해 울어주고 숨겨진 아픔을 쏟아내 주는 의미의 위안을 표현하고자 했다.
 
▲(한명구 배우)위안이라는 것이 꼭 위로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같이 울어주는 것도 위안이 될 수 있다.
 
-끝부분의 경우 표현주의적으로 풀긴 했지만 작품 전반적으로 근대 리얼리즘 연극을 표방했다.
 
▲(김종석 연출)알다시피 이 작품에는 고전의 재해석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다. 고민을 거듭하다 다섯 차례나 대본을 수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본을 읽으면 읽을 수록 원작 텍스트의 힘이 느껴졌다. 특히 인간 군상이 너무나 잘 묘사돼 있는데 그런 장점을 배우를 통해 살리고자 했다. 가능한 한 음악이나 무대적 장치는 생략하고 배우의 힘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것, 그게 리얼리즘 정신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연기양식의 경우 배우들에게 극사실주의를 주문했지만, 무대표현 양식은 재현적이지 않은 방식을 택해 현대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에 보면 물에 잠긴 사람들, 배의 이미지를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60년대의 이야기 아니라 현재 우리의 모습과 연결시키려 했다.
 
-곰치와 구포댁의 딸인 슬슬이가 죽는 마지막 장면의 경우 원작에서처럼 목을 매는 게 아니라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식으로 처리했다. 이유는?
 
▲(김종석 연출)원작대로 가면 슬슬이의 죽음에서 오는 충격 여파가 너무 크다고 봤다. 그보다는 구포댁과 곰치의 모습을 강조하는 데 더 무게를 뒀다. 바다라는 것이 이들 가족 모두에게 삶의 터전이지 않나. 사실 목을 매다느냐, 바다로 가느냐를 두고 어제까지 고민하다 겨우 결론을 내렸다(웃음).
 
김나볏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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