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을 다룬 영화는 수없이 많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2001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였다. 주인공 로봇 데이비드가 숲속에 버려지는 장면이나 사람들이 광적으로 로봇을 처형하는 장면 등은 지금도 생생하다. 배우 주드 로가 연기한 로봇 지골로도 잊을 수 없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지골로(제비족)는 ‘여성 전용’ 로봇이다
영화가 개봉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10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한 성인용품 박람회에서 로봇 록시(Roxxy)가 첫선을 보였다. 신장 170cm에 몸무게 54kg의 록시는 여성 로봇이다. 사용자의 취향에 따라 피부색과 신체 사이즈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제조사는 남성 로봇 로키(Rocky) 출시할 예정이다. 다른 용도는 없다. 오로지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이 로봇들의 용도다.
록시는 ‘섹스 로봇’ 논란에 불을 붙였다. 불을 지핀 것은 일군의 학자와 과학자들이었다. 영국의 로봇 인류학자인 캐서린 리처드슨 박사와 스웨덴의 로봇공학자인 에릭 빌링 박사를 주축으로 반대 캠페인이 시작됐다. 홈페이지까지 개설하고 이런 로봇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기술은 중립이 아니다. 섹스 로봇은 성적 착취에 기여할 것이다.”
AI 로봇만큼이나 드론으로 통칭하는 비행 로봇도 SF 영화의 단골 메뉴다. 비행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 역시 수없이 많다. 개인적으로 가장 무서웠던 것은 2013년 개봉한 <오블리비언>에서 등장하는 드론이었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드론은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가공할 위력을 선보인다.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에서 살아남은 인간을 찾아내 제거하는 것이 이 드론의 임무다.
둥근 공 모양의 드론은 움직이는 생명체를 찾아낼 수 있는 레이저 탐지기와 단숨에 섬멸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두려움도 없고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는다. 오로지 비행하고(매우 날렵하고 빠른 속도로), 탐색하고(절대 중단하지 않는다), 파괴하는(적으로 간주하면 가차 없이 공격을 가한다) 기능만 최적화되어 있을 뿐이다. 영화를 보면 ‘저런 드론을 만나면 끝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드론, 비행 로봇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더 정확한 용어는 ’킬러 로봇(살상용 로봇)‘이다.
킬러 로봇을 둘러싼 논란도 뜨겁다. 지난해 8월 전 세계 AI, 로봇을 개발하는 26개국 116개 기업 대표들이 킬러 로봇 개발을 금지해달라는 내용의 공동 공개서한을 UN에 보냈다. 여기에는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 알파고를 개발한 딥마인드 공동창업자 무스타파 술래이만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킬러 로봇을 “한번 열리면 닫을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한번 개발되면 무력 충돌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규모와 속도로 이뤄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행동할 시간이 오래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얼마 전 눈을 감은 스티븐 호킹을 비롯해 놈 촘스키와 같은 세계적 석학도 킬러 로봇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들은 2015년 “킬러 로봇은 내일의 칼라시니코프(옛 소련이 개발해 지금까지 가장 많이 생산된 자동소총. 전쟁과 학살의 대명사처럼 불린다)가 될 수 있다”며 킬러 로봇 개발을 규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우리나라가 난데없이 킬러 로봇 논란에 휩싸였다. 9개국 과학자 57명이 “KAIST 국방인공지능융합연구센터가 다양한 킬러 로봇을 개발할 가능성이 있다”며 공동연구를 비롯한 모든 협력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다행히 총장이 직접 서한까지 발송하는 등 적극 해명하면서 어느 정도 진화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AI나 로봇을 둘러싼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킬러 로봇은 글자 그대로 기계(로봇)가 자체적으로 판단해 인간을 살상하도록 만들어진 기술이다. 핵무기나 화학무기에서 보듯 과학기술이 윤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인간 통제를 벗어나 알아서 공격 대상을 정하고 살상 여부를 결정하는 킬러 로봇은 그 한계를 알기가 더욱 어렵다.
그동안 우리는 AI나 로봇 기술 등에 환호만 보낸 게 사실이다. 선진국을 따라잡고 미래 사회를 여는 과학기술을 응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이번 논란은 우리도 과학기술 분야에서 국제사회의 규범과 인류 보편의 가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억울해하거나 당황해할 일은 아니다. 이제 우리도 그런 위치가 된 것이다.
김형석 <과학 칼럼니스트·SCOO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