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상산고에서 촉발된 자율형사립고(자사고) 폐지 열풍이 서울 지역 자사고 9곳과 부산 해운대고의 일반고 전환으로 이어졌다. 교육부가 지난 2일 이들 10개 자사고에 대한 각 지역 교육청의 지정 취소 요청을 검토한 결과 동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해당 학교들은 대부분 반발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외고 등 특목고가 정부와 한바탕 전쟁을 치룰 전망이다.
자사고는 다양한 교육수요를 수용하겠다는 명분으로 김대중 정부에서 도입되었고 이명박 정부 시절 크게 확대되었다. 자사고는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는 대신 교육과정 편성에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게 되고, 반면 학부모들이 통상 일반고 보다 많은 수업료를 부담하여야 한다.
그런데 자사고 도입의 명분, 즉 다양한 교육수요를 수용하겠다는 것은 법문에만 존재하고 대다수의 자사고가 입시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사고가 입시위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자사고 폐지론의 핵심인데 그렇다면 자사고를 폐지하면 입시위주의 교육과정이 없어진다는 말인가. 현재 자사고 커리큘럼이 비판받는 근본적 이유는 “입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사고폐지가 고교교육의 정상화로 연결될 수는 없다.
대학은 서열화 되어 있고 그 서열화 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정시 또는 수시를 통해야 하는데 수시는 다시 학생부교과전형, 학생부종합전형(학종), 논술고사, 적성고사, 특별전형 등등으로 나뉘며 그 세부적인 종류는 대학별 학과별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과거에는 단일화된 입시제도 하나만 보고 대비하면 됐지만 지금은 입시 제도를 공부해서 제도 자체를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준비를 해야 하는 지경이다. 이런 극히 복잡한 입시 제도를 그대로 두고서는 어떤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고교 교육의 정상화는 요원한 일이다.
일반고는 어떤가. 현재 입시 위주가 아닌 다양한 교육수요를 만족시키고 있는가? 아니다. 자사고를 폐지하더라도 다른 종류의 입시교육 위주의 학교가 생기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다면 과학고와 영재학교가 그 자리를 대체할 뿐이다.
일각에서는 자사고 폐지가 고교교육 정상화의 첫걸음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은 문제해결의 선후를 정반대로 보고 있다. 부모의 사회적 자본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입시제도만 획기적으로 개혁하면 자사고는 스스로 일반고 전환을 신청할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자사고와 특목고 폐지를 추진하더라도 추진 주체는 ‘자아’가 하나였으면 좋겠다.
상산고가 귀족학교라고 비판하며 폐지에 앞장선 김승환 전라북도 교육감은 사교육 도움을 받아 자신의 아들을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보냈다. 그 곳 한 학기 학비는 우리 돈으로 1300만 원이나 되는데, 여기야말로 귀족 학교가 아닐까. 그러나 김 교육감은 지난 7월30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내로남불 아니냐“는 학부모들 주장에 대해 ”부모 입장에서 '(아들이) 케임브리지 가고 싶다'며 거기 가려면 이런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절차를 거쳐서) 합격했다' 그러면 안 된다, 거기 귀족 학교다. 이렇게 말하는 게 정상적인 부모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김 교육감은 인터뷰에서 ‘진보교육감’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내세우고 있는데 갑자기 부모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웠다. 여기서 혼란이 온다. 자사고 폐지를 주장하는 교육감이 느닷없이 부모의 마음을 얘기할 때, 듣는 사람들은 혼란을 넘어 참혹함을 느낀 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는 것일까.
차라리 ‘자녀의 미래를 위해 부모로서 그런 선택을 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자사고 폐지는 우리 교육의 미래를 위해 어려워도 해나가야 하는 일’이라고 변명했다면 그나마 한 사람이 목소리로 들릴 것이다. 선출직 공직자라면 위치나 때에 따라, 여러 자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아를 유지해야 유권자들이 설득이 되지 않을까.
부모의 사회적 자본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입시 제도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선출직 공직자의 자아가 편의에 따라 분리된다면, 개혁에 어떠한 미명을 붙이더라도 지금의 고교교육 정상화 작업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김한규 법무법인 '공간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