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안정훈 기자] 인공지능(AI) 확산으로 반도체 산업의 호조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산업 규모가 커질수록 국내 기업을 겨냥한 특허소송도 함께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메모리 시장의 핵심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넘어, 이들을 고객사로 둔 중견·중소 소부장 기업들까지 파급이 미치는 양상입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친 특허권자 정책 기조가 강화되면서 특허관리전문회사(NPE)의 승소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사진=삼성전자)
미국 내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을 상대로 한 특허 공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15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해 11월 미국계 NPE 모노리식3D로부터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당했습니다. 앞선 2024년에는 AMT로부터 메모리 반도체 특허 침해 소송을 당한 바 있어, 연이은 분쟁에 시달리는 상황입니다.
삼성전자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해 9월 삼성전자는 반도체 전문 NPE인 넷리스트로부터 고대역폭메모리(HBM), 더블데이트레이트5(DDR5) 등 주력 메모리 반도체가 자사 D램 관련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당했습니다. 넷리스트는 지난 2021년 SK하이닉스에도 소송을 제기해 4000만달러(약 600억원) 규모 합의를 끌어낸 바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특허 소송 공세가 대기업을 넘어 국내 중견·중소기업으로까지 확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구자근 의원이 14일 지식재산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미국 램리서치는 지난 2020년 이후 한국 반도체 부품·장비 기업을 상대로 총 12건의 특허침해금지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여기에는 월덱스, 원세미콘, 씨엠티멕스 등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고객사로 두고, 반도체 식각 공정에 필요한 실리콘·쿼츠 등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포함됐습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특허 공세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더욱 거세졌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등록 특허의 적절성을 다시 검증하는 특허무효심판(IPR)의 효력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전환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종전 약 30% 수준이던 IPR 개시 거절률은 지난해 9월 신임 특허청장 취임 이후 90% 안팎까지 급등했습니다. 지난해 9월 삼성전자가 미 기업 헤드워터와 특허소송에서 특허청에 IPR을 신청했다가 거부된 것이 대표적입니다. 결과적으로 특허를 가진 미국 기업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한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M16 공장 전경. (사진=SK하이닉스)
이에 국내 기업들도 자체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하며 지식재산권 확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공시된 삼성전자 3분기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회사는 지난 3분기에만 총 27조원을 R&D에 투입해 국내 7766건, 미국 7475건의 특허를 등록했습니다. 분기보고서 기준 삼성전자가 보유한 전체 특허는 28만1502건으로, 이 가운데 10만4664건이 미국 등록 특허입니다.
기업별 대응을 넘어 정부 차원의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구 의원은 “정부가 앞장서서 유치한 글로벌 기업이 오히려 국내 산업에 위해를 가하고 있음에도 정부는 이렇다 할 대책 없이 바라만 보고 있는 형국”이라며 “지식재산처가 특허분쟁 대응 전략 지원사업을 시행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지식재산권 분쟁의 성격상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미국 기업이 개별적으로 소송하는 걸 정부가 나서서 거드는 모양도 부적절하다”며 “결국 기업들이 소송을 거는 것은 기존에 있던 원천기술들이니, 상대 기업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기술을 확보하는 형태로 대비하는 게 적절한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안정훈 기자 ajh76063111@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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