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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치명적 사랑이 남긴 '상처'의 풍경
국립오페라단 창립 50주년작 <카르멘>, 인물성격 분석 돋보여
2012-10-17 18:06:25 2012-10-17 18:07:56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하루가 멀다하고 언론에서 치정 살인사건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이다. 사건의 면면을 살펴보면 가해자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비극적인 선택을 한 경우가 대다수다.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자가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사랑을 잃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패턴이다. 가해자가 자신을 파멸로 이끈 사랑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까지 불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립오페라단이 창단 50주년을 맞아 무대화한 오페라 <카르멘>은 세비야 거리 담배공장의 위병으로 일하는 정직한 군인이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면서 살인에 이르는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연출을 맡은 폴 에밀 푸흐니는 비제의 오페라 작품에 충실하면서도 프로스페 메리메의 원작소설 속 등장인물의 성격을 십분 살려 사랑의 포로가 대중의 적이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 눈길을 끈다.
 
더블캐스팅으로 이뤄지는 이 공연에 세계적인 오페라가수 두 명이 주역으로 참여했다. 캐서린 제타존스를 연상하게 하는 관능적인 외모의 메조소프라노 케이트 올드리치는 집시여인 카르멘으로 분해 사랑의 자유로운 속성을 효과적으로 구현해냈다. 베테랑 테너 장 피에르 퓌흐랑은 돈 호세를 맡아 진지하고 성실한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열렬한 사랑에 빠지고 불법을 자행하게 되는지 섬세한 연기로 표현했다.
 
특히 상징으로 가득찬 무대는 그리고 가수들의 캐릭터 표현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비극적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무대는 크게 두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극초반에 드러나는 것은 관객석과 가까운 무대 앞부분의 위병소 풍경이다. 쇠창살이 있는 가벽 앞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고 위병들은 그 앞에 하릴없이 일렬로 앉아 관객석으로 시선을 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가벽의 쇠창살 사이로는 거리를 바삐 걸어다니는 양복 차림의 신사들이 언뜻언뜻 비친다.
 
위병소의 의자와 테이블은 단순히 사실적인 소품으로 기능하는 게 아니라 극중 내내 다양하게 활용되면서 인물의 성격변화를 표현하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성실한 위병인 돈 호세는 테이블과 의자를 일렬로 정돈하지만, 담배공장 여공인 카르멘은 정리된 테이블과 의자를 계속해서 발로 차며 돈 호세를 유혹한다. 카르멘의 유혹에 굴복한 돈 호세는 급기야 바르게 놓인 테이블과 의자를 자진해서 발로 차며 일탈의 길로 빠져 든다.
 
위병소의 의자와 테이블은 음악적 효과를 살리는 데도 기여한다. 카르멘은 '사랑은 제멋대로인 한 마리의 새'를 부를 때 반복되는 세 박자의 후렴구에 맞춰 움직인다. '의자, 의자, 테이블' 순으로 높낮이가 다른 소품 위를 밟고 다니는데 자유분방한 카르멘의 성격을 표현하는데 그만일 뿐만 아니라 극적정서도 효과적으로 고조시킨다.
 
위병소 장면 이후 가벽이 천정으로 올라가 사라지면서 뒷편의 원형 회전무대가 공개된다. 원형무대는 반절만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면은 뚫려 있지만 후면은 원형경기장의 벽으로 구현돼 있고 그 뒤로는 기울어진 성당 구조물이 기대어 세워져 있다. 이 무대는 장면에 따라 회전하면서 카르멘이 일하는 담배공장이 되기도 하고, 성당 아래의 술집이 되기도 하고, 투우장이 되기도 하며, 밀수꾼들이 숨은 산기슭이 되기도 한다.
 
원형무대가 가장 재미있게 읽히는 순간은 캐릭터의 대립 구도와 맞물리는 찰나다. 원형 무대는 때때로 상대와 경쟁을 해야 하는 링처럼 읽힌다. 카르멘과 돈 호세가 원형 무대 위에 오른 경우 옛 애인 미카엘라가 주변을 맴돌고, 돈 호세와 미카엘라가 무대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는 카르멘이 주변을 돈다. 극이 절정으로 치닫기 직전, 원형 무대 오른쪽 위에 멀리서 커다란 조형물이 잠시 떠오르는데 뿔 달린 황소의 돌진하는 모습은 카르멘이 링 위에서 벗어나 결국 희생될 것임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카르멘의 집시 친구 프라스키타와 메르체데스가 카르멘보다 앞서 돈 호세의 칼에 스러져 간다는 점이다.
 
케이트 올드리치는 격렬하고 거친 야성과 나른한 관능을 오고가며 변화무쌍한 연기를 펼쳐 '이 시대의 카르멘'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했다. 특히 캐스터넷츠를 치면서 돈 호세를 유혹하는 장면은 좀처럼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돈 호세 역의 장 피에르 퓌흐랑도 여유있는 목소리에서 한순간에 절정으로 치닫는 목소리로 넘나들며 사랑의 포로이자 대중의 적이 된 돈 호세를 잘 표현해냈다.
  
푸흐니와 여러 번 작업을 함께 했다는 벤자망 피오니에의 오케스트라 지휘는 음악이 단 한 순간도 겉돈다는 느낌이 없을 정도로 극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장면에 따라 무대 뒤편에서 돈 호세의 목소리와 트럼펫 연주소리, 합창소리가 들리는 등 원근감을 제대로 살려 음악적 요소를 배치한 점도 돋보였다.
 
한마디로 국립오페라단의 <카르멘>은 무대디자인과 연출, 연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공연이었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국립오페라단 창단 50주년 기념 공연인데 프랑스 오랑주 오페라 페스티벌 제작진이 선보이는 무대라는 것 정도다.
 
연출 폴 에밀 푸흐니, 지휘 벤자망 피오니에, 오케스트라 코리안심포니, 합창 의정부시립합창단, 무대.의상디자인 루이 데지헤, 조명디자인 파트릭 메우스, 출연 케이트 올드리치, 장 피에르 퓌흐랑, 김선정, 정호윤, 강형규, 정일헌, 박현주, 최주희, 18일부터 21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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