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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의사협회가 침묵했던 이유
2014-06-23 08:00:00 2014-06-23 08:00:00
지난해 12월15일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 의사협회가 주최한 '전국의사궐기대회'에 전국에서 2만명이 넘는 의사들이 차가운 여의도의 아스팔트 위에 앉아 "원격진료 반대"와 "영리병원 반대"를 소리 높여 외쳤다.
 
16개 시도의사회장을 포함한 의료계 대부분의 리더들이 참여한 행사는 마침 의료법인의 영리자법인 설립을 허용하는 내용의 제4차 투자활성화 대책이 발표된 지 이틀 후에 열림으로써 의료민영화 반대 궐기대회로 알려졌고, 전국적인 의료민영화 반대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정부의 의료영리화 정책으로 인한 의료 왜곡을 막아내기 위해 시작된 의사들의 투쟁은 급기야 3월10일 전국적으로 전공의까지 동참하는 대정부 투쟁으로 확대됐다. 장기적인 의료대란이 일어날 위기의 직전 상황까지 치달은 것이다.
 
그러나 의사협회와 정부는 원격진료는 시범사업을 통해 안전성을 확인한 후에 추진하는 것으로, 투자활성화 대책은 보건의료단체와 협의를 거쳐 안전한 보완책을 마련한 후에 추진하는 것으로 극적인 합의를 했다. 그리고 이 합의를 의사들이 투표를 통해 받아들임으로써 3월24일로 예정되었던 6일간의 총파업은 유보됐다.
 
그런데 지난 6월10일 정부는 이 합의를 깨뜨리고 의료법인의 부대사업 항목을 늘리는 내용의 의료법 시행규칙 일부개정안의 입법예고와 영리자법인 설립과 관련한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동시에 발표했다. 의사협회와 정부가 합의한 의-정 합의사항을 무시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예상대로라면 의사협회는 강하게 반발하며 유보했던 총파업 카드를 다시 꺼내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의료 영리화를 저지하기 위해 총파업까지 불사했던 의사협회가 정부의 일방적인 발표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침묵을 지킨 것이다.
 
심지어 3일 후인 6월13일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한의사협회, 대한약사회, 대한간호협회,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등 5개 보건의료단체가 강력한 대정부 규탄 성명을 발표할 때에도 의사협회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부의 의료영리화 정책을 막기 위해 가장 앞장서서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벌였던 의사협회가 정부의 의료영리화 강행 발표에 왜 입을 닫고 침묵하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 이유는 당시 의사협회가 회무 공백상태였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 대의원회는 지난 4월19일 지난 6개월간 대정부 투쟁에 앞장섰던 노환규 의협회장을 불신임시켰다. 불신임의 사유는 공개되지 않았다. 실제로 문서로 만들어진 불신임 사유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의협회장 탄핵을 위해 소집된 대의원총회에서 구두로 낭독됐을 뿐이다.
 
대의원들은 비공식적으로나마 불신임의 사유에 대해 대정부 투쟁에 실패했다는 주장과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해를 함으로써 의협의 명예를 실추시켰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제 이유는 이와 다르다.
 
첫째, 대의원의 3분의 2를 장악하고 있는 시도의사회장들은 노환규 회장이 회원들의 뜻을 받들어 추진하는 대정부 투쟁을 부담스러워 했다. 둘째, 노환규 회장이 대의원의 비민주적 선출 절차를 문제 삼으며 대의원 개혁을 시도하고, 이를 위해 의사회원총회를 추진하자 이를 급히 막으려 한 것이다.
 
의협회장의 탄핵은 보궐선거(6월2일~6월18일)로 이어졌고, 정부는 의협회장의 보궐선거 기간에 사전 예고 없이 투자활성화 대책을 추진했다. 일시적으로 의사협회의 회무가 정지된 상황에서 의료영리화 정책을 밀어붙인 것이다. 의사들이 정부의 의료영리화 정책 추진에 분노하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더욱 염려됐던 것은 노환규 회장의 탄핵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인물들이 과거 원격진료와 의료영리화 정책에 찬성했던 후보를 보궐선거에서 당선시키기 위해 지지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 후보는 대다수 시도의사회장과 대의원 등 의료계 리더들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의협회장 후보에 나섰다.
 
그러나 의사 회원들은 시도의사회장들과 대의원들이 후원한 그 후보를 선택하지 않았다. 6월18일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제38대 의협회장 당선자로 발표된 사람은 전임 노환규 집행부에서 정책이사직을 맡아 수행하던 후보이자 전임 집행부의 회무 연속성을 위해 출마 의사를 밝혔던 추무진 후보였다. 그는 19일부터 의협회장으로 정식 회무를 시작했다. 대의원들의 쿠데타가 실패한 것이다.
 
의협은 늦었지만, 빠르게 변하고 있다. 소수의 리더들이 독점하던 의사협회에서 벗어나 사회와 호흡하고 전체 회원들의 뜻이 반영되는 의협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밖으로는 잘못된 의료제도를 저지하기 위한 대정부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소위 의협의 민주화를 위한 개혁 투쟁이 진행 중인 것이다.
 
진료에 매진해야 할 의사들이 익숙하지 않은 대정부 투쟁과 의협의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이유는 환자를 고치는 것뿐 아니라 올바른 의료제도를 만드는 일도 의사의 책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협의 민주화를 이루는 길만이 정부의 잘못된 의료정책을 바꿀 수 있는 '강한 의협'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4월16일 진도 앞바다에서 가라앉은 세월호는 국민들의 마음속에 크나큰 슬픔과 분노를 안겼다. 그런데 의료현장에서는 한 달에도 몇 척씩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다. 잘못된 의료제도의 문제점 때문에 억울한 죽음이 매일 일어나는 것이다. 선원들이 세월호의 위험성을 미리 알고 있었듯이 의료현장에서 벌어지는 환자들의 억울한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고 있는 의사들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많은 의사들이 의사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대정부 투쟁과 의협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사고위험을 알면서도 문제를 외면해 끝내 비극을 초래한 비겁한 세월호의 선원이나 해피아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다. 자신의 양심과 거래하는 의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처음 흰 가운을 입으며 마음속에 다졌던 그 순수한 각오를 지키기 위해서다.
 
의협은 수개월 간의 회무 공백에서 빠르게 벗어나 원격진료와 정부의 의료영리화 정책에 강력히 반대했던 지난 의협 집행부의 방향성을 지속하며 정부의 의료영리화 정책에 다시 제동을 걸고 나설 것이다.
 
신임 의협 집행부는 사분오열된 의사협회를 추스려 정부와 다시 투쟁을 벌여야 하는 힘겨운 상황에 놓여 있다. 여기에 정부는 지난 3월 하루 총파업 투쟁을 강행했다는 이유로 의협에 거액의 벌금을 부과했고, 투쟁을 이끌었던 노환규 전 의협회장과 임원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의협을 압박하고 있다.
 
어려운 싸움을 다시 시작하는 의사협회와 의사들에게 국민의 이해와 응원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전 대한의사협회장 노환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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