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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고종의 길’을 걸으며
2016-08-23 06:00:00 2016-08-23 08:42:30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일본어과 교수
나는 언제쯤 왕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언제쯤 먼저 간 당신의 영혼을 편히 쉬게 할 수 있을까/ 이 나라를 초라한 눈빛으로 살피던 별들도 사라진 새벽/ 며칠 전부터 눈을 붙이지 못한 채 날개만 퍼덕이는 불길한 상상들을/ 눈발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지러이 날린다/ 자신의 파편들을 털어내는 것 같은 현기증으로 가득하다/ 잃어버린 별빛을 그리워하며 허공에서 표류하는 바람도 한 치 앞을 뛰어다니지 못하고(중략) / 낯선 외국어 몇 개도 금방이라도 대문을 활짝 열고/ 감옥 같은 이곳으로 몰려올 것만 같은데/ 과연 저 외국어들은 사랑하는 여인 하나도 지켜내지 못한 나를/ 어떻게 번역해낼까 백천간두 같은 이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예측하고 있을까/ 눈발은 여전히 내가 돌아가서 안착해야 할/ 왕궁의 길마저 감출 것만 같은데 
-오석륜 「왕의 노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새벽」 부분, (『리토피아』 2014년 겨울호)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황급히 러시아공사관 쪽으로 몸을 옮기고 있었다. 왕세자의 발걸음도 고종과 동행하고 있었다. 그 날의 날씨를 기록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나,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고종과 왕세자를 휘감았을 것이다. 그리고 눈보라가 그들의 길에 어지러이 휘날렸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극비리에 궁녀로 변장하고서 궁녀의 가마에 타고 있었다고 하니, 슬프기만 했던 역사의 한 장면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듯하다. 가슴 먹먹하다. 위의 시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껴안고 살았던 조선의 26대 왕 고종의 심경을 필자의 상상력으로 묘사하여 계간지 『리토피아』에 발표한 것이다.
 
이 역사적 사실이 아관파천이다.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이다. 아관은 러시아공사관을 뜻하는 말로 정동에 있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던 기간은 1년여이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으니, 그야말로 왕의 무능함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의 압박을 극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 지도자들의 허약함이나 분파적 상황 등이 대내외에 알려진 사건이라는 평가에는 이의가 없을 듯하다. 아마도 고종은 그때,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던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음력 8월 20일)을 또렷하게 기억해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침략이 점차 노골화되고 심각해지는 상황을 걱정하며 왕으로서의 무능함을 느꼈을 것이다. 
 
'고종의 길’은 당시 고종이 몸을 피했던 바로 그 길이다. 그 길이 120년 만에 복원된다고 한다. 대한제국 시기에 미국공사관이 제작한 정동지도는 덕수궁 선원전(璿源殿)과 현 미국대사관 사이의 작은 길을 ‘왕의 길(King's Road)로 표시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밝힌 구체적으로 복원하는 길은, 덕수궁 북서쪽 끝에서 옛 러시아공사관을 직선으로 잇는 길이 약 110미터, 폭 3-4미터의 좁은 길이다. 공사기간은 올해 9월부터 2017년 말까지라고 한다. 문화재청은, “‘고종의 길’과 덕수궁 선원전 구역 복원을 통해 일제에 의해 훼손된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근대사 현장을 보존해 서울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겠다.”며 이번 복원사업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이번 복원사업은 필요한 일로 생각된다. ‘고종의 길’은 우리나라가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부딪쳤던 슬픈 역사의 길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그늘이 드리워진 길이기 때문이다. 허약한 국력으로 많은 것을 빼앗겼던 역사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고종의 길’ 복원은 의미 있는 작업으로 느껴진다. 향후 실보다 득이 많은 작업으로 평가받기를 기대한다. 많은 사람들이, 복원된 ‘고종의 길’을 걸으며 당시의 고종과 우리의 근대가 겪어야 했던 녹록치 않았던 여정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경복궁 내에 있었던 고종의 서재이며 외국 사신 접견 장소이기도 했던 집옥재(集玉齋, 1891년 건립)가 개방되었다고 하니, 그곳에 남아 있는 고종의 숨결과 근대화의 숨결도 함께 어루만져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일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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