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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인문학)⑪김밥 - 저만치 피어있는 봄꽃들 사이로 뵈는 아름다운 소풍의 기억
입력 : 2016-04-27 오전 6:00:00
자식이나 연인 등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전날부터 재료를 사고 다듬어서 필요한 준비를 마친 후 아침 일찍 김밥을 싸는 손길에서 느껴지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미소 짓게 만들 온기이다. 비장하게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한 따듯함이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의 시 산유화이다.
 
알다시피 소월(素月)이 호이고,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다. 19029월 7일 외가인 평북 구성군 서산면에서 태어나 19341224일 고향이자 본가인 평북 정주군 곽산면에서 사망했다. 당시로선 별 의미가 없었을 크리스마스 이브에 숨진 30대 초반 젊은 시인의 사망원인은 아편 과다복용, 즉 자살이었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다. 떠도는 얘기로 죽기 이틀 전에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란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고 한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인 귀화 필기시험에 진달래꽃의 지은이가 누구냐가 출제된 적이 있을 정도로 소월은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귀화시험 출제 사례를 들지 않아도 한국인의 거의 대다수가 소월을 한국의 대표시인으로 부르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소월의 대표시는 응당 진달래꽃이다.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 해도 산유화는 대체로 소월을 대표하는 두세 번째 시로는 꼽힌다. ‘진달래꽃초혼과 마찬가지로, 요즘으로 치면 김광석의 유행가에서 느껴질 법한 보편적이면서 구체성을 획득한 애상이 담겨있다.(‘요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도 되는 게 요즘 대학생들도 김광석을 즐겨듣는다고 한다.) 동감의 감성을 시의 형식으로 적절하게 형상화한 소월의 작품은 그래서 전통적이며 동시에 미래의 어느 시점이건 그 시점에서도 항상 현대적일 수밖에 없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영화 <데몰리션맨>가상 성행위가 실제로 섹스를 대체하는 시대에 이르러서야 소월 시의 현대성은 과거형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여담으로, ‘초혼은 오산학교 재학 중에 소월이 사랑한 오순이란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다가 22세의 젊은 나이에 숨져 그 장례식에 참석한 뒤에 쓴 시라는 설이 전한다. 만약 이 설이 맞는다면 초혼뿐 아니라 진달래꽃에도 오순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볼 수 있겠지만, 산천에 피는 꽃이 사연이 있어 피는 것이 아니듯 시는 시인 것을. 딱 소월만큼만 살고 자살한 김광석의 노래 또한 사랑의 흔적이 어리었든 애절을 차마 감내하지 못하였든 그저 노래로 울려 퍼져 노래이듯, 사랑이 가도 시와 노래는 저 봄꽃들처럼 때 되면 피어나는 존재가 된다.
 
저만치 피어있는 꽃
소월과 김광석이란 시인과 가수는 이제 자신들이 저만치 피어 있는 꽃이 되었다. 주변에 적잖은 사람들이 김광석과 다양한 형태의 안면이 있으나 나는 그와 일면식이 없다. 그렇지만 다른 많은 386처럼 혹은 요즘의 복고풍 대학생들처럼 김광석의 많은 노래에 친숙하다. 소월과는 당연히 일면식이 없다. 하지만 소월의 시는 김광석의 노래보다 빨리 접했다. 내 기억으론 중학교에 입학하며 소월시집을 읽었다. 지금 과도하지 않게 때가 묻은 채 적당히 삶에 지쳐가는, 딱 그 나이만큼의 기름기가 얼굴에 번들거리는, 과거 까까머리에 거뭇거뭇 수염이 날 듯 말 듯 하던 내 중학교 시절의 동무들과 시() 외우기 놀이를 한 기억이 난다. 말 그대로 뒷동산에 올라 바위에 걸터앉아 누가 먼저 외우나로 경쟁하며 놀았던 시가 소월의 시였던 것 같다. 어느 시였을까.
 
기억의 장면은 또렷하지만, 그 시가 무엇이었는지는 저만치 기억 너머에서 소환되지 않는다. 오며가며 남산의 시비를 봐서라기보다는 그냥 산유화라고 하자. 또 그때 근처에 닿을 듯 말 듯 산유화가 피어 있었다고 치자. 그때 외었든 그 뒤에 외었든 내 뇌리에 남아서 가끔씩 출몰하는 구절은 산유화중에서도 저만치였다. 시험에서 반드시 저만치의 의미를 물은 게 뇌리에 남은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이상하게 시험을 보지 않게 된 이후로도 저만치는 진짜로 저만치서 가끔씩 날 따라왔다.
 
산촌 와서 10년 잇는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서 보아도 인사는 아주 글러진 듯합옵니다. 세기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압서서 다라간 것 갓사옵니다. 독서도 아니하고 습작도 아니하고 사업도 아니하고 그저 다시 잡기 힘드는 돈만 좀 노하보낸 모양이옵니다. 인제는 또 돈이 없으니 무엇을 하여야 조켓느냐 하옵니다.
 
소월이 죽기 몇 달 전 스승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세기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압서서 다라간 것 갓사옵니다.”는 문장에 가슴이 메어온다. 저만치 혼자서 버려진 느낌. 꽃다운 청년기를 좌절에 빠져 10년 가까이 술에 절어 은둔하다 인생행로의 마지막에 도달한 소월. 저만치 앞으로 달아난 세상, 오도카니 초라하게 홀로 버려진 자신을 인생무대의 밖에서 들여다보면 영락없는 자신의 시 산유화이다. 그러나 자살하기 직전에 소월이 떠올렸을 시가 무엇이었을지는 내 어릴 적 암송놀이의 대상처럼 알 수가 없다. 더구나 그때 그가 자신의 시를 떠올렸을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하다. 단지 소월이 자신의 생각과 달리 저만치 혼자서 버려지지 않고 저만치에 꽃으로 피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삶이라는 소풍
시대와 불화한 사람은 많고, 시대에서 낙오한 사람은 훨씬 더 많지만, 불멸의 이름으로 남은 이는 극소수다. 남한에 번듯한 문학관 하나 없다 하여도 김소월은 우리에게 그런 이름이다.
 
반면 생전에 이름 없이 살다가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 못한 갑남을녀에겐 시대와의 불화 같은 개념 자체가 없다. 대열이 없으니 낙오가 없다. 고통이 덜한 게 아니라 고통을 느낄 여유가 없다. 시인은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고통 때문에라도 아름답게 받아들여 삶을 아름다운 소풍[천상병]으로 판정하려고 애쓰지만 시와 역설의 프리즘을 갖지 못한 우리네에게 세상은, 가끔 아름다운 말 그대로의 소풍으로나 소박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끝을 짐작하지 못할 전반적 노역이다.
 
힘든 세상에 그래 소풍이라도 있어야겠다. 살인적인 노동으로 악명 높았던 1970~80년대 초반의 구로공단에서도 봄·가을에 등산이나 야유회를 갔다고 한다. 봄꽃이 앞 다투어 저만치서 피는 호시절, 고단한 삶에 잠깐의 빈틈이 없을 수 없으며 그런 소풍에 김밥이 빠질 수 없다.
 
삽화/김희헌
 
저만치서 나를 둘러싸는
김밥이란 게 참으로 소풍에 최적화한 음식이다. 휴대가 편하고 맛있다. 김밥 자체로는 아무리 호사를 부려도 빈부귀천의 차이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매우 민주적인 먹거리이다. 야외에서 둘러앉아 부담 없이 나눠 먹을 수 있다.
 
평범해 보이는 음식인 이 김밥에는 산유화에 보이는 것과 동일한 심오한 저만치의 철학이 내재한다. 밥과 김, 그리고 계란지단 단무지 시금치나물 등 속재료가 하나의 완성체로 구성되려면 균형과 거리(距離)를 내포한 융합이 필요하다. ‘밥김이 아니라 김밥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밥은 이 완성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속재료를 김과 저만치 띄어놓으며 동시에 밀착시킨다. 불교식으로 말해 불일불이(不一不異), 부단불상(不斷不常)이다. 하나가 되거나 각기 다른 것이 되어버리면 김밥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밥은 시인의 음식이 아니다. 반대로 20대 총선에서도 드러났듯 민심은 불일불이하고 부단불상하며 민초의 삶 또는 그러하기에 그리하여 김밥은 모두의 음식이 될 자격을 갖는다.
 
그러나 김밥의 본질은 이 같은 요망한 해석보다는 김밥을 싸는 손길에서 찾아진다. 소풍 가는 누군가를 위해, 함께 소풍 갈 누군가를 위해 김밥을 싸는 손길을 떠올려보자. 정성껏(이 말은 모든 조리과정에 따라 붙기에 이후에는 생략한다.) 밥을 짓고 초로 그 밥을 버무린 다음 미리 준비한 속재료와 함께 발로 동그랗게 만다. 간단해 보이지만, 재료 하나하나를 사전에 준비해야 하기에 적잖게 품이 드는 작업이다. 준비과정과 식사 간의 대비가 매우 큰 음식이 김밥이다. 오래 준비하지만 먹는 건 순식간이다.
 
여기서 자식이나 연인 등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전날부터 재료를 사고 다듬어서 필요한 준비를 마친 후 아침 일찍 김밥을 싸는 손길에서 느껴지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미소 짓게 만들 온기이다. 비장하게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한 따듯함이다. 김을 펴고, 밥을 바르고, 속재료를 배열한 뒤 발로 동그랗게 말아내기까지, 그 이전 작업까지 포함하여 김밥은 적지 않은 과정에서 일일이 손을 써야 만들 수 있는 먹거리이다.
 
나중에 김밥을 먹을 즈음엔 식었겠지만,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그래서 소월의 시구를 읽는 듯한 나름 벅찬 감정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소중한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김밥 한 개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시선에 어쩌면 저만치 산유화가 피어 있겠거늘.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
 
저만치서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에 애이불비(哀而不悲)하다.
 
안치용 토마토CSR연구소장
손정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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