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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공적 연기금의 천동설 투자, 그 전복이 시작되다
입력 : 2016-10-10 오전 6:00:00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과학의 발전은 연속적이지 않고 비약적이고 혁명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기존의 성과를 부정하면서, 즉 단절과 절연을 통해 불연속적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reak)이다. 토마스 쿤은 바슐라르의 생각을 이어 받아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패러다임 이론'(paradigm theory)을 제시한다.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은 그래서 인식론적 단절 혹은 전환을 전제하고 있는데,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이 그 좋은 예다.
전세계적으로 금융 투자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투자대상의 매출액과 영업이익률 등 재무적 성과만 보고 투자했던 관행은 수십 년 전부터 거대한 도전을 받아 왔고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 비재무적인 성과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금융기관이 급증했다. 이른바 SRI 즉 사회책임투자다. SRI는 대중적인 용어로 단순화하면 '착한 기업에 투자하여 착한 수익을 올리고 아울러 좋은 세상을 만드는 투자철학이자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책임투자 글로벌 네트워크인 '책임투자원칙'(PRI)에 가입한 기관은 1567(107일 현재)에 달한다. 이들이 운용하는 자산만도 62조 달러가 넘는다. 전세계 사회책임투자 규모는 2014년 기준으로 213580억 달러로, 총 운용자산 대비 30.2%를 차지한다. 21.5%이던 2012년보다 8.7%p 증가했다. 미래학자 패트리셔 애버딘의 예견대로 금융의 물결은 사회책임투자로 모아져 대양(大洋)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세계 사회책임투자 규모에서 유럽의 비중이 63.7%를 차지하고, 더 나아가 2014년 전체 투자액의 58.8%가 사회책임투자 방식으로 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 사회책임투자의 패러다임이 전통적인 투자 패러다임과 경쟁하다가 이제는 역전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의 의미 있는 변화의 배경은 다양한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한 가지는 영국이 연금법을 개정을 통해 사회책임투자 관련 법을 만들어 200073일부터 시행해 왔다는 사실이다. 연금펀드를 운용하는 모든 주체들이 투자자산의 선택·보유·매각과 관련해 사회적, 환경적, 윤리적 요소를 어느 정도 고려하고 있는지와, 의결권을 포함해 주주로서의 권리행사와 관련해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히라고 의무화한 법이다.
 
연금펀드연합(NAPF)의 강력한 반대와 연금성 공무원들의 부정적인 입장 등에도 이 법이 실현될 수 있었던 건 정부의 일관되고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다. 실제로 법 개정 과정 동안 장관이 3명이나 교체되었음에도 사회책임투자를 향한 정책 마련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사회책임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의원들로 구성된 범 정당모임의 법안 지지도 빼놓을 수 없다. 독일·스웨덴·오스트리아·노르웨이·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벨기에 등도 영국과 유사한 법을 도입했다. 유럽의 다수 나라들은 투자대상의 ESG를 고려하는 사회책임투자의 원칙이 연금펀드 운용자들에게 부여된 선관주의 의무(fiduciary duty)와 모순된다는 기존의 전통적 인식과 단절한 셈이다. 공공성과 수익성은 동시에 추구될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로 돌아와 보자. 우리나라의 사회책임투자는 2015년 말 78650억원 규모로 웅덩이 수준에 불과하다. 이 중 공적 연기금의 비중이 89.76%에 달하는데 국민연금이 무려 87.11%으로 압도적이다.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곧 우리나라 공적 연기금이 사회책임투자를 적극 선도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올해 총 65개의 공적 연기금 중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연금만이 기금의 일부를 사회책임투자 방식으로 운용하고 있고, 그 규모는 사실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실제로 국민연금의 경우 2015년말 전체 기금운용 대비 사회책임투자 비중은 1.33% 밖에 되지 않는다. 2012년 이후 줄곧 이런 수치에서 정체되어 있다. 사회책임투자를 점진적으로 늘려가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 온 국민연금의 허구적 일단(一端)이 이 비중을 통해 드러나고 만다. 국민연금이 사회책임투자를 모든 자산군의 투자원칙이 아닌 단순한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도 이 비중이 의미하는 바다. 이는 국민연금이 2009년에 가입한 PRI의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연기금은 중장기적 자산보유가 불가피하다. 때문에 단기적 성과보다는 기업의 장기적인 가치 제고가 중요하다. 사회책임투자는 연기금의 이런 특성에 제대로 부합하는 투자철학이자 전략이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을 필두로 한 우리나라 공적 연기금은 유럽이 상당 부분 버렸고 세계가 버리고 있는 투자 패러다임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 폭스바겐 사태 등 수많은 비재무적 리스크로 피 같은 돈을 날리고도 ESG 고려의 중요성을 좀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아니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의 철저한 포로가 되어 혹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에 저항하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 공적 연기금의 자산 규모는 15796055억원에 이른다. 자본시장의 큰 손인 공적 연기금의 투자철학과 전략은 사회책임투자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하는가. 유럽처럼 법과 제도적인 인프라 구축을 통해서다. '국가재정법 개정'을 통해 모든 공적 연기금이 ESG를 고려하고 공시하는 법적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이 법이 실효성을 가지도록 '기금운용평가지침'ESG 관련 제반 지표를 신설해 평가에 반영해야 한다. 이는 기존 투자 패러다임과의 과감한 인식론적 단절임과 동시에 투자 지평의 확대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책임투자 혁명은 이제 시작이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www.ksrn.org)
손정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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