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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스튜어드십 코드와 국민연금의 후안무치
입력 : 2017-03-06 오전 8:00:00
부호의 대저택에서 집안의 대소사와 재산까지 도맡아 관리하는 고용인을 ‘집사(執事)’ 혹은 ‘청지기’라고 부른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기고 위탁한 일과 재산을 주인의 뜻과 정신에 따라 충실히 수행하고 관리할 의무가 있다. 이런 정신을 스튜어드십(stewardship)이라고 한다.
 
연기금·보험·은행·증권·자산운용사 등 금융기관들이 보유·운용하고 있는 자산은 해당 기관의 소유가 아니다. 고객 혹은 가입자들이 일정 기간 맡겨 놓은 돈이다. 때문에 금융기관들은 이 자산을 선량하게 관리해야 할 ‘수탁자 책무(fiduciary Duty)'를 가진다. 즉 타인의 자산을 운용하는 자는 수탁자(trustee)로서 돈을 맡긴 주인(고객 혹은 가입자)의 이익을 위하여 충실(loyalty)과 주의(care)의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의미다. 이 수탁자의 책무를 다하기 위한 지침이 바로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다.
 
2010년 영국이 처음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이후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위스, 캐나다, 남아공, 홍콩, 일본, 말레이시아 등 12개 국가들이 이 영국 규정을 준용해 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12월 7대 원칙으로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를 제정했다. 그런데 300여개가 넘는 기관투자자 중 현재까지 8개 기관(삼성자산운용, 미래에셋자산운용, 한국투신운용, NH-Amundi자산운용, 트러스톤자산운용, 메리츠자산운용, 라임자산운용, 제브라투자자문)만이 코드 참여 예정을 밝혔을 뿐 공식적인 참여기관은 ‘0’이다. 우리나라 자본시장 대통령인 국민연금의 행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견된 일이다. 코드 가입이 강제가 아닌 자율인데다, 코드 제정을 야심차게 추동하던 금융위원회가 재계의 반발-청와대가 제동했다는 소리도 들린다-등으로 이를 형식적이든 실질적이든 민간으로 이양하면서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코드 가입이 활성화를 위한 절대적인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에 코드 가입과 관련해 확인한 바로는 "기금운용위원회에서 논의해 결정해야 한다"가 공식적인 입장이다.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기금운용과 관련한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당연직 6인(보건복지부장관, 기재부, 지식경제부, 노동부, 농림수산식품부의 차관, 국민연금공단 이사장)과 사용자 대표 3인, 근로자 대표 3인, 지역가입자 대표 6인, 관계전문가 2인으로 총 2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금운용위원회는 연 4회 이상 개최할 수 있고, 재적 위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는 경우나 위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 운용위원회의 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두 번 열린 기금운용위원회에 '코드 가입 검토' 안건은 상정되지도 않았다. 또 기금운용위원회도 언제든지 소집 가능함에도 이 또한 검토하고 있지 않다. 결국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이 현재로서는 코드 가입에 부담을 가지고 있고 의지 또한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의지 박약과 부재는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지난 2월 1일 개최한 '국민연금 신뢰제고 실천 결의대회'에서도 드러난다. 국민연금은 "사회공헌, 책임투자, 사회적 신뢰강화 등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고 했지만 이날 발표한 '국민연금 신뢰제고 기본계획'의 기금운용 분야에는 정작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한 가입 혹은 검토는 쏙 빠져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왜 국민연금이 창립 30주년이 되는 올해 '신뢰제고'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가에 대한 배경 설명에는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반성의 흔적조차 없다.
 
2015년 7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가. 삼성 이재용 부회장의 사적 이익과 박근혜·최순실 경제공동체의 사적 이익 앞에 그들이 의결권 행사의 원칙으로 내세운 신의성실, 책임투자 고려, 장기 주주가치 증대 등은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또 기금운용에 사회적 책임성과 윤리성 그리고 투명성을 강화하려는 모든 법적·제도적 노력을 무산시키는 강력한 구실로 삼아온, 그들의 전가보도(傳家寶刀)이자 금과옥조(金科玉條)인 '수익률'과 이를 통한 '기금자산의 증식'마저도 재벌과 권력자의 사적 이익을 위해 기꺼이 포기했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자체 산정한 적정 합병비율에 따라 합병을 진행했을 때에 비해 약 3400억원의 평가손실을 본 걸로 추산되었고, 이러한 손실 예상을 국민연금도 인지하고 있었다. 국민연금 제도 자체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든 중대한 범죄 행위이며, 국민의 노후자금으로 장난을 친 '연금농단'이다. 오죽하면 국민연금의 농단을 방지하자는 취지의 '국민연금법개정안'이 7건이나 발의되었을까. 스튜어드십 코드는 이러한 연금농단을 방지하고자 하는 자율적인 시장감시 제도다. 원칙준수·예외설명(Comply or Explain)이라는 연성법인 이 제도마저 눈치를 보고 가입을 꺼리는 행태를 보고 국민연금을 누가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일착(一着)으로 가입하겠다고 나서도 모자랄 판인데도 말이다. 과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후안무치(厚顔無恥)'하다.
 
일본은 세계 최대 공적연금인 '연금적립금관리운용독립행정법인(GPIF)'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적극 나선 결과, 제도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고 있다. 2014년 2월 도입 이후 4개월만에 127개가 가입하더니 2016년말 기준으로 214개로 늘었다. 일본 기업의 지배구조도 나아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일본의 사례에서 정부와 국민연금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이번 달은 주주총회 시즌이다. 당장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연루된 기업들에 대해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이 어떻게 의결권을 행사하는지 지켜볼 일이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argos68@naver.com
손정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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