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정치란 ‘족식(足食), 족병(足兵), 민신(民信)’이라고 했다. 식량을 넉넉히 하고, 군대를 충분히 하고, 백성의 믿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의 제자 자공이 이 세 가지 중 불가피하게 포기해야 하는 순서를 묻자, 군대가 우선이고 그 다음이 식량이지만 백성의 신뢰는 결코 잃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民無信不立). 논어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이야기로,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사자성어는 이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정권 하에서 비정상적인 운영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고 망가진 기관이 한 둘이 아니지만, 국민연금도 버금가라면 서러울 조직 중 하나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의결권’이라는 수단을 통해 정권과 재벌의 부패 커넥션에 가담했다. 이 사건으로 전임 이사장과 기금운용본부장은 1심에서 각각 2년6개월을 선고 받았다. 최근에는 강면욱 기금운용본부장도 사퇴했다. 합병효과 수치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인사를 주식운용실장으로 부적절하게 승진시킨 일이 사퇴 이유 중 하나라는 분석이다. 국민연금은 현재 CEO와 CIO 모두 대행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20여명의 기금운용역이 회사를 엑소더스(exodus)했다. 전주 이전이 주요 이유지만, 기금운용본부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창립 30주년인 국민연금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국민연금은 올해 2월 1일 ‘국민연금 신뢰제고 실천 결의대회’를 열고, ‘국민연금 신뢰제고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기금운용 분야에서 신뢰를 효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인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가입 혹은 검토는 쏙 빼놓아 진정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사회책임투자(SRI)도 그렇다. 국민연금은 2006년부터 기금의 일부를 사회책임투자 방식으로 위탁운용하면서도 지금까지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정책과 로드맵을 한 번도 제시한 바 없다.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웹사이트 ‘책임투자’ 페이지에는 “책임투자와 관련하여, 이해관계자 및 전문가의 충분한 의견수렴과 공감대 형성 과정을 거쳐 정책을 점진적, 단계적으로 검토할 예정”라고만 공시되어 있다. 사회책임투자 정책 공시는 2015년 1월 국민연금기금 투자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고려와 의무공시를 골자로 한 국민연금법과 기금운용지침 개정에 따른 의무 공시사항 중 하나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은 2008년 당시 서갑원 의원실과 유사한 입법안을 추진한 바 있다. 당시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 법안 추진에 반대하면서 책임투자원칙(PRI) 가입을 약속했고, 정책과 로드맵에 대해서는 현재 웹사이트에 올려진 내용과 판박이로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정책과 로드맵 수립을 위해 이해관계자 의견을 수렴했다는 그 어떤 정보도 들은 바 없다.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국민연금의 진정성과 신뢰성은 이 지점에서 무너져 내린다.
물론 국민연금은 책임투자 가상펀드 운용, 사회책임투자형 펀드 신규 벤치마크지수 도입, 국내 주식의 ESG 평가모형을 구축 등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책과 로드맵 등 근본적인 부분에 전혀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사실 앞서 열거한 노력들도 이목희 의원이 2013년 국민연금의 ESG 고려와 공시법안 발의에 따른 국민연금 차원의 대응책 성격이 짙다. 2008년 PRI 가입도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책임투자를 위한 인프라를 열심히 구축하고도 정작 이듬해 펀드투자는 4800억원 이상이나 줄여 버린, 2015년과 2016년의 이 역설적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정권 교체 이후, 국민연금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고자 노력하고 있는가. 필자의 눈에는 아직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국민연금은 최근 고려대 산학협력단과 ‘국민연금의 책임투자와 스튜어드십 코드에 관한 연구’ 용역계약을 체결했지만, 4번의 유찰로 의도적 지연이라는 의심까지 받았다. 이해관계자들의 스튜어드십 코드 가입 압박에도 버티던 국민연금이 사실상 가입을 기정사실화한 용역계약을 체결한 건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라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국민연금의 정치?경제권력으로부터 독립’과 ‘주주권 행사 강화로 건전한 시장질서 확립’을 공약한 문재인 대통령은, 특히 사회책임투자 원칙에 입각한 국민연금의 주주권을 강화를 약속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스튜어드십 코드의 실효성 제고를 적시했다. 최근 스튜어드십 코드와 사회책임투자가 주목을 받고 있는 건 대통령의 이 공약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이번 용역에 스튜어드십 코드만이 아니라 사회책임투자를 추가하고, 사업 내용에 사회책임투자 활성화 방안과 정책토론회 개최에 관한 사항을 포함시킨 건 매우 고무적이다. 이해관계자의 다양한 의견 수렴을 통해 사회책임투자 로드맵을 도출해 제시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태도는 일관되게 등 떠밀려 가는 모양새다.
국민연금의 시급한 과제는 리더십 공백 해소다. 그리고 바닥까지 추락한 기금운용의 신뢰를 중장기적으로 제고하는 일이다. 무신불립. 국민의 믿음이 없다면 국민연금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신뢰는 독립성을 바탕으로 투자의 책임성, 공공성, 투명성, 장기적 수익성을 확보함으로써 높일 수 있다. 사회책임투자와 스튜어드십 코드는 이를 위한 가장 좋은 투자정책이다. 책임은 신뢰의 성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마지 못해 하는 수동적 책임 이행으로는 어떤 신뢰도 확보할 수 없다. 국민연금은 이제 세계 3위의 연기금답게 사회적 책임에 대한 적극적 리더십을 고민하고 발휘해야 한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