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일부 내용에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실 정말 화가 났을 것 같았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얘기가 기정사실처럼 떠돌아 다녔다. 이젠 그 얘기를 꼭 그가 의도했던 것처럼 모두가 믿고 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가 ‘그것’을 의도하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용주 감독이 고개를 숙이고 쓴웃음을 터트렸는지도 모른다. 딱 10년 만에 신작을 선보였는데 의도하지 않은 ‘SF후폭풍’에 휘말려 버렸다. 2012년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든 ‘건축학개론’ 이후 10년 만에 신작 ‘서복’을 선보였다. ‘복제인간’ ‘영생’ ‘비밀프로젝트’ 등 ‘서복’을 수식하는 단어는 꽤 많다. 문제는 이 단어가 뜬금 없이 ‘서복’을 SF장르로 포장해 버린 것이다. 제작비 역시 무려 160억이나 투입됐다. 이 영화를 소비해야 할 예비 관객 입장에선 ‘뭔가 엄청난 스펙터클이 기다릴 것이다’는 기대감을 숨길 수 없게 만드는 것들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용주 감독은 ‘서복’을 SF영화로 만들지 않았다. 묵직한 주제의 드라마 구조가 강한 얘기로 시작했고, 또 그렇게 만들었다. 배우들도 당연히 알고 참여했다. 시작부터 ‘서복’에 엉뚱한 프레임이 덧입혀졌다. 이 영화를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 낸 이용주 감독에게 진짜 ‘서복’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이용주 감독. 사진/CJ ENM
첫 질문부터 가장 중심이 될 것 같은 ‘그’ 얘기를 꺼내봤다. 이 감독은 웃음부터 터트리며 ‘무슨 얘기’를 해올지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유 박보검 ‘투톱’ 영화였다. 하지만 ‘서복’이 대중에게 더 어필했던 점은 두 배우의 출연보다도 ‘건축학개론’을 만든 이용주 감독 신작이란 점, 그리고 160억 제작비가 투입됐단 점. 여기에 ‘복제인간’ ‘영생’을 다룬 얘기였기에 당연히 ‘SF장르’란 일 것이란 기대감이었다.
“하하하, 진짜 진땀 나네요(웃음). 진짜 솔직히 말씀 드리지만 단 한 번도 ‘서복’을 SF장르라고 주변에 소개한 적도 없고, 제작사 투자사 배급사 모두 SF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어디서 SF란 단어가 나왔는지 저도 궁금해요(웃음). ‘서복’은 ‘두려움’이란 한 단어에서 출발했고, 그러다 보니 ‘복제인간’ 얘기가 들어가야 했는데 그게 장르의 선입견과 고착화를 끌어 낸 건 아닌가 싶어요. 뭐 연출자로 어떤 식으로든 관객 분들에겐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웃음)”
이용주 감독은 예상 밖으로 필모그래피가 적다. 이 질문에도 이 감독은 쑥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죄송하다’는 말로 농담 반 진담 반의 쑥스러움을 대신했다. 2009년 ‘불신지옥’으로 연출 데뷔를 한 뒤 2012년 ‘건축학개론’으로 대박을 터트렸다. 차기작이 금방 나올 법했지만 무려 10년이 걸렸다. 하지만 이용주 감독은 ‘서복’을 준비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을 투자했단다. 사실 시작으로만 보면 ‘불신지옥’과 비슷한 시기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고.
이용주 감독. 사진/CJ ENM
“‘불신지옥’과 같은 시기에 준비한 건 아니고, 키워드로 보자면 ‘서복’과 ‘불신지옥’이 맞닿아 있어요. ‘불신지옥’의 확장판 개념으로 ‘서복’을 보시면 이해가 될까 싶어요. ‘불신지옥’에서 소진(심은경)이 어떤 특별한 존재로 그려지잖아요. ‘서복’에서 서복(박보검)이 그렇게 보이길 바랐죠. 소진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처럼 서복 역시 그러길 바랐고. 그 중에서 기헌(공유)이 서복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 그게 ‘서복’의 줄거리였어요.”
그는 ‘불신지옥’ 촬영이 끝난 뒤 약간의 건강 염려증이 생겼던 것 같단다. 가까운 지인이 그 당시 투병 중이었는데 개봉 이후 돌아가셨다고. 그때의 충격으로 ‘두려움’이란 감정에 집중하게 됐고, ‘불신지옥’의 그림이 만들어 진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서복’에서 더욱 더 구체적이 됐다. 절대 죽지 않는 존재, 그리고 시한부 삶을 사는 존재. 두 존재를 통해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단다.
“내 삶의 엔딩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죠. 그 질문에서 출발하다 보니 ‘영생’이란 키워드 그리고 ‘복제인간’이 떠올랐어요. 중국 설화에서 ‘서복’얘기를 보고 ‘이거다’ 싶었죠. 예전에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논란을 바라보는 여러 다른 시선도 흥미로웠잖아요. 이게 국위 선양으로 봐야 하나? 아니면 진짜 그런가? 아니면 믿음을 가장한 광기인가? 그런 질문으로 취재도 해봤고. 제 생각에는 지금도 어디선가 진짜로 복제인간 연구를 하고 있고 또 성공했을 것 같아요. 그런 상상이 완성되니 이야기의 얼개가 하나 둘 이어지더라고요.”
이용주 감독. 사진/CJ ENM
‘서복’에서 주인공이자 복제인간 ‘서복’을 연기한 박보검은 더 없는 캐스팅이었다. 그가 아니면 ‘서복’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배역이었단 점에서 이용주 감독은 무조건 공감이었다. 당연히 그랬고, 처음부터 ‘서복’은 무조건 박보검이었다고 한다. 만약 ‘박보검’이 출연을 거절했다면 사실상 영화 제작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고. 정말 안 된다면 신인으로 캐스팅을 할 예정이었단다. 결국 박보검은 ‘서복’에 출연했고, 이용주 감독은 박보검의 얼굴에서 ‘선과 악’을 넘나드는 기묘한 ‘서복’을 이끌어 냈다.
“박보검이 아니었다면 진짜 제작 자체를 고민했을 거에요. 만약 출연을 거절했다면 ‘전혀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 캐스팅을 고려했겠지만 그것도 가능성이 너무 적은 선택지였어요. 결과적으로 출연을 했고 정말 ‘대박’이었죠. 현장에서 가끔씩 촬영을 하고 오케이를 하기 전에 카메라 감독님이 ‘봤어? 지금?’이라고 할 정도로 박보검의 눈빛이 엄청났어요. 전 그걸 무조건 살리는 작업에만 집중했죠. 보검이가 눈빛에 따라서 선과 악이 급격하게 오가는 모습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어요.”
이용주 감독은 ‘서복’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원’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그의 설명처럼 예상하지 못했지만 ‘서복’에는 원에 대한 이미지가 정말 많이 등장한다. 서복이 사는 반구 형태의 실험실, 기헌과 서복이 바닷가에서 보게 되는 거대한 세 떼의 원형,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등장하는 국정원 요원들을 가둬 버리는 원형의 싱크홀. 이 점은 이용주 감독이 ‘서복’을 만들면서 가장 공을 들인 영화적 장치다.
이용주 감독. 사진/CJ ENM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였어요. ‘서복’에는 원에 대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해요. 이건 프리 단계에서도 제가 고집했던 부분이에요. 서복의 집, 서복이 바닷가에서 만드는 돌무덤, 서복이 초능력을 써서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가둬버린 싱크홀 등이 모두 원형이잖아요. 기헌이 환상 속에서 보는 바닷가 위 거대한 달의 이미지도 원형이고. 가장 완벽한 형태, 가장 우주적인 형태가 원이 아닐까 싶었죠. 그럼 왜 원 일까. 기헌의 죄의식과 서복의 초능력이 만들어 내는 기적이 만나는 순간 역시 원을 통해 결국 만난다. 이런 의미로 많은 공을 들여 봤어요.”
이용주 감독 입장에선 정말 황당할 수도 있지만 ‘서복’을 본 관객 들이라면 영화 마지막 기헌과 서복의 관계가 마무리되는 장면에서의 의아함이 강하게 작용할 듯했다. 죽지 않는 존재와 죽음을 앞둔 존재. 그리고 두 존재는 결국 마음을 나누는 관계가 된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특별한 능력을 통해 죽음을 앞둔 존재를 구원해 주는 일종의 해피엔딩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용주 감독은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이용주 감독. 사진/CJ ENM
“하하하. 네 맞습니다. 그런 기대를 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기헌이 서복을 죽이면 기헌은 결국 죽어요. 하지만 기헌이 서복을 살리면 주변의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 죽어 나갈 거에요. 그래서 서복도 기헌에게 ‘형이 끝내주세요’라고 하잖아요. 전 기헌이 죽는 게 아니라 서복과의 최후를 선택하는 그 장면에서 궁극적으로 구원 받았다고 느껴요. 두려움이란 건 마주할 용기가 없기에 두려움이지 그걸 인정하고 마주하게 되면 그땐 두려움이 아니잖아요. 기헌이 그걸 마주하겠단 선택이 영화 속 결말이고. 말씀하신 대로의 해피엔딩을 선택했다면 제가 ‘서복’을 만들 이유가 없었죠(웃음). 엔딩은 초고단계에서부터 단 한 번도 수정되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그게 ‘서복’이어야 했으니까요.”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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