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 기자]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한국수력원자력에서 원전업계 인사들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한수원의 고리 원자력본부에서 원전업계 인사 6~7명과 이들 간의 관계가 그려진 문건을 갖고 있었고 내부에서 공유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문건에는 국민의힘 유력 정치인의 이름까지 등장합니다. 한수원이 문건을 인쇄물로 출력해 외부로 유포한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원전업계에서는 이 같은 일련의 일들이 개별 원자력본부 차원에서 진행할 수 없다며 더 큰 배후가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A 게이트 구조'…국민의힘 유력 정치인도 등장
27일 <뉴스토마토>의 최근 한 달 간 취재 내용을 종합하면, 한수원에서 출력된 한 문건이 올해 초부터 원전업계에 유포됐습니다. 문건 제목은 친원전단체 소속 A씨의 이름을 딴 'A 게이트 구조'입니다. 문건에는 A씨를 포함해 친원전 인사로 분류된 6~7명의 이름이 있으며, 이들끼리의 은밀한 관계도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2023년 3월23일 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문제는 문건이 생산되고 유포된 과정에 한수원이 직접 관련됐다는 점입니다. 문건 중앙에는 한수원 로고와 특정문자 코드로 구성된 '출력물보안 마크'까지 찍혔습니다. 문건은 한수원 내부 컴퓨터에 저장됐다가 출력됐고, 한수원에서 출력됐다는 걸 표시하는 출력물보안 마크가 인쇄물에 함께 들어간 겁니다.
원전업계에선 한수원이 원전업계 인사들 동향과 관계를 파악한 문건을 소지했고 이를 내부에 보고했다는 건 사찰과 다름없다고 주장합니다. 한 관계자는 "문건은 마치 등장인물들이 범죄에 연루된 것처럼 보이도록 작성됐다"면서 "윤석열정부 출범 후 한수원이 친원전 인사들을 사찰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는 "문건에 내밀한 인맥까지 나오는 걸 보면 한수원이 원전 정책에 관해 정부와 뜻이 다른 사람은 누구이며, 동향은 어떤지 감시하고자 해당 문건을 만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라며 "각 원자력본부에서 취합되는 이런 정보는 본사와 황주호 사장에게까지 보고가 됐을 것"이라고 의심했습니다.
이달 초 일부 원전업계 인사들은 해당 문건이 유포되는 것에 심각성을 느끼고, 한수원에 문건 작성 의도와 목적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한수원은 "문건은 당사 OO본부 홍보부에서 2024년 1월경 출력한 것으로 파악된다"면서도 "문건이 어떤 경위로 전달됐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실관계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문건 유포로 명예가 훼손된 피해자가 생겼지만, 추가적 사항은 공개하지 않은 겁니다.
국내 첫 상업용 원자력발전소인 고리원전 1호기 전경. (사진=뉴시스)
한수원에는 원전 운영을 맡은 5개의 원자력본부가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의 고리원전본부 △전남 영광군 한빛원전본부 △경북 경주시 월성원전본부 △경북 울진군 한울원전본부 △울산 울주군 새울원전본부 등입니다. 취재가 시작되자 한수원에선 해당 문건이 고리원전본부 홍보부에서 출력된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고리원전본부 측은 <뉴스토마토>와의 통화에서 해당 문건을 소지하게 된 경위에 관해 "한 매체 기자가 취재노트 차원에서 대충 손으로 그린 걸 줬고, 우리가 알아보기 쉽게 문건으로 다듬은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어 "문건은 부서 차원에서 내부 공유만 하고 폐기했고, 원본을 줬던 기자가 인쇄를 부탁하길래 출력해 전달했는데 그 기자를 통해 외부로 유출된 것 같다"면서 "고리원전본부 홍보부를 벗어나 한수원 상부, 황 사장에게까지는 절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건이 외부로 광범위하게 유포됐을 가능성'을 묻자 "그런 일은 없는 걸로 안다"고 했습니다.
끊이지 않는 사찰 논란
한수원의 사찰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직원 메일을 뒤지거나 노조위원장, 탈원전 반대 인사들의 동향 보고서를 만드는 등 사찰 논란이 계속됐습니다. 한수원 기조에 반하는 사람·단체를 감시했다는 의혹은 역대 정부를 가리지 않고 터져 나왔습니다.
지난 2021년 8월 강창호 한수원 새울원자력본부 새울1발전소 노조위원장은 국가인권위원회에 백운규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정재훈 한수원 사장 등을 상대로 진정서를 냈습니다. 강 위원장은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조작 등 조기 폐쇄 의혹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앞서 검찰은 월성 원전 1호기 의혹을 수사하면서 산업부 공무원들이 강 위원장에 대한 정보와 동향을 수집해 작성한 ‘한수원 노조 관련 동향 보고’, ‘한수원 노조 탈원전 인사 고소 동향’ 등의 문건을 확보한 걸로 전해졌습니다. 아울러 검찰은 2017년 1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탈원전 정책에 비판적인 의견을 제기한 시민단체 등의 동향보고서 10여건을 작성했다가 삭제한 흔적도 찾은 걸로 알려졌습니다.
2016년 초엔 한수원이 원전의 안전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탈핵을 주장한 언론·시민단체·정치인들의 동향을 분석하는 용역을 시행한 걸로 드러나 논란이 일었습니다. 2015년 11월엔 정의당이 경북 영덕에서 실시된 신규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와 관련해 한수원이 사찰에 가까운 감시와 견제로 투표를 방해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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