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원정기자] ‘출발선이 다른 경주’ 혹은 ‘체급이 다른 선수 간의 권투’.
오는 2월 한미FTA가 발효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국내 콘텐츠업계는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를 중심으로 자본력을 앞세운 미국기업에 종속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어 비상이 걸렸다.
미국의 방송시장 규모는 국내 30배에 달하지만 국내 PP업계는 아직 내성을 키우지 못한 업체가 다수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미국기업과 공정한 경쟁을 벌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국내 제작 방송콘텐츠 편성쿼터 일제히 축소
한ㆍ미 FTA로 방송서비스 분야의 국산 제작 프로그램 편성 비율은 일제히 줄어든다.
세부적으로 국내 유료방송 프로그램 편성비율 가운데 영화는 25%→20%, 애니메이션은 35%→30%로 줄이도록 협정은 정하고 있다.
반면 수입방송물의 국가별 편성 비율은 기존 60%에서 80%로 늘게 된다.
이는 미국 등 특정국가의 방송프로그램 편성비를 최대 80%까지 허용한다는 것으로, 특정국 제작물이 채널을 독식하는 현상을 막기 위한 ‘보호장치’가 그만큼 느슨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2009년 기준으로 국내 프로그램 수입금액은 1억2000만 달러이고, 이 가운데 미국 드라마·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74% 규모다.
편성쿼터 자체가 국내 콘텐츠산업 보호를 위해 마련된 것인데, 한미FTA는 외국제작 콘텐츠의 국내 편성쿼터를 늘리고 국내제작 콘텐츠 편성쿼터는 줄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PP에 대한 외국인의 간접투자도 100% 허용될 전망이다.
해외자본이 간접투자는 국내법인을 거쳐 지분을 소유하는 방식(보도전문채널, 종합편성채널, 홈쇼핑채널 제외)으로 현행 방송법은 외국인의 간접투자를 50%로 제한했지만, 한ㆍ미 FTA는 이를 전부 풀도록 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달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한 방송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한미FTA 2월 발효..방송업계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미국 콘텐츠의 국내 시장 진입이 많이 이뤄진 만큼 FTA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국내 PP 다수가 콘텐츠를 구매해 유통하는 채널이 많다는 데서 기인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FTA가 발효되면 미국 콘텐츠 기업이 국내 기업을 끼고 들어와 자사 콘텐츠를 유통해 한국 내 수요를 만들어 놓고 나중에는 콘텐츠 공급과 유통을 틀어막은 뒤 콘텐츠 가격을 올리는 등 판권을 행사하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고 업계는 말한다.
한미FTA로 국내법인에 대한 해외자본의 간접투자가 100% 허용된 만큼 미국기업이 직접 한국 내 법인을 만들어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는 모습도 전망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나중에는 국내 방송사업자가 미국 콘텐츠를 못 사서 안달 하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고 그뿐 아니라 미국기업이 독자PP를 세워서 외부콘텐츠의 자사 채널 유통을 막을 수도 있다”며 “미국기업이 콘텐츠를 팔더라도 단가를 세게 책정해 공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 2007년 한미FTA 비준을 놓고 당시 사회적 논란이 한창일 때 티브로드 계열 티캐스트가 미국 FOX 계열 콘텐츠를 다수 들여온 일이 있어 미국 콘텐츠의 국내 유입은 예상 보다 확산 속도가 빠를 수 있고 이는 그렇게 멀고 먼 미래의 이야기도 아니다.
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제일 걱정하는 것은 미국 콘텐츠가 물밀 듯 들어오는데 턱없이 높은 가격에 사야할 때”라면서 “미국기업이 국내 법인에 일부 들어온 현 상황에서도 실제 자사 채널에만 프로그램을 주는 조짐이 벌써 있다”고 말했다.
◇국내 콘텐츠 제작기반은 신생아 수준..문화제국주의에 종속될 우려
보다 우려되는 사실은 국내 프로그램 제작 기반이 아예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이라고 업계는 입을 모은다.
국내 방송 제작 기반을 신생아 수준으로 보는 데는 업계 이견이 없다.
지상파방송에서 10여 년 동안 한류 콘텐츠를 만들어 그동안 해외시장에 유통했지만 성공여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엇갈리는 상황이고, 유료방송에서는 CJ계열 PP가 시장에 안착했다는 평가가 많지만 기간은 이제 2~3년 지난 수준이다.
업계는 국내 콘텐츠 산업이 움튼 시점으로 ‘tvN’이 자체 제작한 <슈퍼스타K>, <롤러코스터>, <막돼먹은 영애씨> 가 잇달아 성공한 사례에서 찾고 있지만, ‘tvN’ 역시 그 과정에서 수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쳤다.
업계 관계자는 “콘텐츠 제작이라는 것도 투자 대비 회수되는 게 있을 때나 가능하다”며 “우리는 제대로 역량을 갖추기도 전에 한미FTA를 맞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도 자선사업가가 아닌 이상 무작정 투자할 수 없다”며 “정부가 한미FTA를 유예하거나 콘텐츠 산업 육성책을 내놓지 않으면 결국 미국콘텐츠로 확 쏠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강준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과 박영일 한국콘텐츠진흥원 수석연구원은 지난 10월 발간된 ‘KOCCA포커스’에서 애니메이션 편성쿼터 축소로 예상할 수 있는 피해액 이 연간 70억 원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장기적으로 국내 방영물 감소는 콘텐츠 생산물량 축소와 이에 따른 국내 기업의 수익 구조 위축으로 나타나 경쟁력 없는 중소PP 퇴출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업종별 희비 엇갈려..“게임은 건재, OTT는 무방비 노출”
물론 콘텐츠 업종마다 희비는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의 경우 한미FTA 여파가 크지 않고 외려 미국콘텐츠 유입이 이들의 선택권을 넓히는 효과를 누리게 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지상파방송사 콘텐츠에 의존해온 관행을 이참에 벗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PP업계 일각은 현재 국내 제작 프로그램 편성 비율도 지키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한미FTA로 인한 편성 쿼터 축소를 반기는 여론도 없지 않다.
또 자본력을 앞세운 미국 콘텐츠의 국내 진입이 이들에게 긍정적 자극을 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 효과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이다.
시민단체는 미국의 선정적 콘텐츠를 국내 기업이 따라하는 ‘부정적 자극’이 우려된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인터넷업계도 한미FTA 발효를 앞두고 잔뜩 긴장하고 있다.
인터넷업계가 무엇보다 주시하는 것은 저작권 문제로, 한미FTA와 발맞춘 저작권 강화가 네이버ㆍ다음 등 주요 포털의 카페·블로그나 디시인사이드ㆍ판도라TV 등 멀티미디어 서비스 운영업체들의 활동성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달 발표한 저작권법 개정안은 패러디를 비롯한 비영리 목적의 게시물도 처벌대상에 포함하고 피해자가 손해를 입증하지 않아도 저작물당 1000만원 이하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콘텐츠 산업의 한 축인 게임의 경우 한미FTA가 발효돼도 건재할 것이라는 여론이 우세하다.
미국은 비디오게임 위주이고 한국은 온라인ㆍ모바일 게임이 성행하고 있어 시장 자체가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또 편성 쿼터로 나라별 칸막이를 두고 있던 방송과 달리 게임은 애초부터 통상장벽이 없었기 때문에 한미FTA가 발효돼도 영향이 덜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똑같이 통상장벽을 두지 않았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경우 미국 콘텐츠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향후 문제가 크게 불거질 수 있다는 여론이 많다.
방송 콘텐츠의 경우 편성쿼터로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일정 부분 마련해놨지만, 신규 서비스인 온라인 동영상은 ‘미래유보’ 조항만 둔 채 편성쿼터는 물론 어떤 안전핀도 없는 상황에서 미국 콘텐츠에 노출될 상황이다.
◇“방송콘텐츠산업 뿌리부터 말라버린 대만 사례 참고해야”
전문가들은 대만의 방송산업 사례를 참고하라고 충고한다.
대만은 미국 콘텐츠에 의존하다 자국 내 방송제작기반이 뿌리째 뽑혀 나갔다.
단기적으로 콘텐츠 제작 보다 유통이 훨씬 손쉽고 돈도 덜 들다 보니 해외 의존도를 계속 심화시켰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수입 콘텐츠 의존도를 낮추고 자체 프로그램 제작과 편성을 늘리는 한편 수출을 통한 2차 판권 수익 증대를 도모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런 선순환 구조가 마련될 때 미국 등 콘텐츠 강국과 맞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이 같은 선순환 구조가 막 움트는 시점에서 한미FTA라는 분수령을 맞게 됐다는 점이다.
예상보다 일찍 닥친 해외 자본 유입이 경쟁력을 키울지 아니면 미국이라는 문화제국주의에 종속될지 국내 콘텐츠기업은 갈림길에 서게 됐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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