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대법원이 24일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자들의 피해를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의 첫 판결을 내렸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지 약 70년만으로, 피해자인 원고들은 일본 최고재판소에서도 같은 취지로 소송을 냈으나 기각돼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차에 대법원이 일본 기업의 불법성과 피해보상에 대한 책임을 정면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일본 판결에 대한 승인 여부 ▲구 미쓰비시와 피고 미쓰비시, 구 일본제철과 피고 신일본제철의 동일성 여부 ▲한일 청구권협정의 체결로 인한 원고들의 청구권 소멸여부 ▲피고들의 소멸시효 항변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지 여부 등이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명쾌하게 판시했다.
◇"일본 법원 '식민지배는 합법'..우리 헌법과 충돌"
대법원은 먼저 일본의 판결을 승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법원은 “우리 헌법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强占)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그 효력이 배제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일본의 원고 패소판결 이유에는 일본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을 전제로 하여,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원고 등에게 적용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평가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며 “이것은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으로 이를 인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의 기업들과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을 시킨 기업들의 동일성 인정 문제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당연히 인정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구 미쓰비시, 구 일본제철이 피고 미쓰비시, 피고 신일본제철로 각각 변경되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는 구 미쓰비시, 구 일본제철의 영업재산, 임원, 종업원을 승계하여 회사의 인적, 물적 구성에는 기본적인 변화가 없었음에도, 전후처리 및 배상채무 해결을 위한 일본 국내의 특별한 목적 아래 제정된 기술적 입법에 불과한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 등 일본 국내법을 이유로 구 미쓰비시의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채무가 면탈되는 결과가 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공서양속에 비추어 용인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어 “이 사건에 대한민국 법률을 적용해 보면, 일본의 회사경리응급조치법, 기업재건정비법에 의하여 1950년 해산된 구 미쓰비시와 피고 미쓰비시, 구 일본제철과 피고 신일본제철은 각각 그 실질에 있어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법적으로는 동일한 회사로 평가하기에 충분하다”며 “일본국의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구 미쓰비시, 구 일본제철이 해산되고, 제2회사가 설립된 뒤 흡수합병의 과정을 거쳐 각각 피고 미쓰비시, 피고 신일본제철로 변경되는 절차를 거쳤다고 하여 달리 볼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한일청구권협정은 정치적 합의..법적 청구권 살아 있어"
대법원은 1965년 6월22일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원고들의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일본 기업측 주장도 일축했다. 이 부분은 일본 기업과 일본 재판소가 피해자들의 청구를 인정하지 않은 핵심 이유로 일본과 한국에서도 이에 대한 법리공방이 치열했다.
대법원은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체결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하여는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아니하였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그 근거로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은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 대가관계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 점 ▲청구권협정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한 점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가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점 등을 들었다.
◇"일본 기업의 소멸시효 주장은 신의칙 위반"
대법원은 이어 “원고들이 이 사건 소를 제기할 시점까지는 원고들이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며 “구 미쓰비시, 구 일본제철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법적 지위에 있는 피고들이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여 원고들에 대한 채무의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여러 소송에서 승소 가능성을 인정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라며 “대한민국의 헌법적 관점에서 일부 원고들이 이 사건 소에 앞서 제기한 일본에서의 소송에서 일본재판소가 내린 원고 패소 판결의 승인을 거절한 것에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배상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대법원 관계자와 이번 소송에서 원고측을 대리한 법무법인 해마루의 장영석 변호사는 “파기환송심 법원에서 원고승소로 판결이 확정되면 일단 그 판결을 근거로 한국내에 들어와 있는 미쓰비시나 신일본제철의 재산에 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우리나라 내에 재산이 없다면 일본으로 가서 채권을 행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일본 법원으로부터 우리 법원 판결의 승인을 받아한다”며 “다만 판결 승인을 받기는 쉽지 않은 과정으로 충분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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