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순욱·최기철기자]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금감원에서 근무하던 A씨는 최근 국가 지원으로 미국 모 법과대학에서 JD(법학박사과정)를 마쳤다. 공부를 마치고 당연히 돌아와야 하지만 A씨는 금감원을 그만두고 미국 S로펌에 취직했다. 이 로펌은 전 세계 20위권 안에 드는 로펌으로 한국진출을 위한 법무부 예비심사를 최근 통과했다. A씨는 S로펌의 홍콩사무소나 서울 을지로에 있는 한국 사무소에 투입될 예정이다.
#정부 모 부처의 차관급 공무원인 B씨는 퇴직을 앞두고 진로 결정에 고민이 많았다. 금융분야에서 오래 근무한 자신의 경력을 살려 로펌에 취업하려 했지만 개정된 빡빡한 공직자윤리법과 변호사법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한 지인으로부터 "외국로펌이 취업하는 데 제약도 없고 보수도 더 세다"는 충고에 한국 진출 예정인 외국로펌들을 눈여겨보고 있다.
◇외국로펌은 '전관(前官)'들의 새 진출로
퇴직을 앞둔 주요 정부부처 공무원들의 분위기가 밝아지고 있다. 국내 로펌 취업이 제한되는 바람에 앞길이 막막하던 상황에 변화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퇴직 전에 이미 국내 대형로펌이나 회계법인 등에 비싼 보수를 받기로 하고 이직이 일찌감치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30일 개정된 공직자윤리법 등 이른바 '전관예우금지법' 때문에 퇴직 후 진로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이러던 차에 한·EU, 한·미 FTA 발효로 외국로펌들이 대거 국내에 들어오면서 전관들의 새로운 활로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요 정부부처가 모여 있는 정부 과천청사에서는 공무원들 사이에 "퇴직 후 갈 곳은 외국로펌이나 외국 컨설팅회사가 최고"라는 말이 돌고 있을 정도다.
실제로 한국 진출을 앞둔 외국로펌들은 퇴직을 앞둔 금융감독원이나 공정거래위원회, 외교통상부 출신의 퇴직 공무원을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감지되고 있다.
최근에는 외국에서 있다가 국내로 돌아와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들을 직접 접촉해 영입작업을 하는 사례도 생겼다.
미국에서 근무하다가 올 초 정부부처 공보라인에서 일하게 된 한 언론인 출신 인사도 미국 로펌으로부터 영입할 공무원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 로펌은 국장급 이상으로 우수한 공무원을 소개해달라고 구체적으로 부탁하면서 "지금 받는 월급의 몇 배를 주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는 사이 퇴직 공무원들은 "우리도 아직 가능성이 있다"며 몸값 올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능력 있는 공무원 다 낚아채" 한국 로펌 비상
반면 한국 로펌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고위 공직자 등 전관을 로비스트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난과 함께 관련법 개정으로 영입이 가뜩이나 어려운데다가 외국로펌까지 능력 있는 공무원들 낚아채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한 대형로펌 파트너급 변호사는 "인력 확보부분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외국로펌과의 경쟁이 있어 왔다"며 "변호사도 그렇지만 전문인력 확보에도 누수가 생겨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정비가 안 된 탓도 있지만 법적인 면에서 퇴직 공직자들을 영입하기엔 외국로펌이 훨씬 쉽다"며 "한국 로펌은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10월30일 국회는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해 고위 공직자들의 로펌 취업을 대폭 제한했다.
이에 따르면, 외형거래액 150억원을 넘는 국내로펌과 회계법인, 외국법자문법률사무소(외국로펌)에는 고위 공직자가 퇴직후 2년간 '퇴직 전 5년 동안 소속했던 부서의 업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업무를 맡지 못한다.
국내 10대 로펌 중 고위 공직자가 취직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해 5월과 10월 각각 시행된 개정 변호사법과 같은 법 시행령은 변호사 2인 이상의 법률사무소에 취직한 퇴직 공직자들은 퇴직 후 매년 1월 말에 보수내역과 업무내역서를 해당 지방변호사회에 제출해야 한다. 법 시행일 이후에 취직한 퇴직 공무원 뿐만 아니라 기존에 취직해 근무하고 있는 퇴직 공무원도 대상이다.
◇퇴직 공무원 외국로펌 취직 제한 사실상 없어
◇퇴직공직자 로펌 취업시 신고의무 비교
반면 외국로펌의 경우엔 이 같은 제한이 없다.
우선 공직자윤리법 시행령상 취업이 제한된 150억원 이상의 외형이라는 제한이 적용되는 기준이 본사인지 한국 사무소인지 구별이 없다. 그리고 개소 초기에는 사실상 이같은 제한이 무의미하다.
또 외국로펌은 공직자윤리법과 그 시행령의 적용만 받기 때문에 업무내역서도 퇴직 1년 경과한 후 한번만 제출하면 된다. 보수내역은 신고하지 않아도 된다. 신고 대상도 새로 취직한 퇴직 공무원에게만 해당된다.
'로비스트 양산', '회전문 인사'를 척결하기 위해 개정한 법제도가 현실적인 후속조치가 따르지 않아 엉뚱한 후유증을 낳고 있는 것이다.
한 중견로펌의 대표 변호사는 "전문 인력인 퇴직 공직자의 영입을 로비창구로 오해하고 있는 시각에 대해 이해한다"면서 "그렇다면 외국로펌에 퇴직 공직자들이 취직하는 것도 제한하는 것이 평등원리에 맞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그는 또 "외국로펌에 국가 요직에 있던 퇴직 공무원이 취직할 경우 기업차원이 아닌 국가차원의 비밀이나 산업 노하우를 누설할 위험이 있는 만큼 더 강하게 규제해야 할 필요성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현행 변호사법시행령 등 위헌 소지도
그는 이어 "변호사법시행령 등 지금의 법규는 소급법률 금지 원칙이나 평등권 침해 등 법 자체로도 위헌성이 크다"면서 "조속한 입법적인 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형로펌의 시니어 파트너급 변호사는 "외국로펌이 국내 업무를 할 수 없는 지금 단계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지금 빨리 정비를 하지 않으면 외국로펌이 직접 한국 내 업무를 할 수 있게 될 때에는 시기가 너무 늦어버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내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한 외국로펌의 변호사는 "아직까지는 퇴직하는 한국 공무원들을 영입하는 것이 활발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한국 내 업무를 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적극 한국의 퇴직 공무원들을 영입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변호사단체들의 태도는 아직 관망세다. 서울지방방변호사회 등 변호사 단체 관계자들은 "아직 국내 업무를 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외국 로펌에서 퇴직 공무원들의 수요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로펌과 외국로펌이 동등하고 평등한 위치에서 경쟁해야 원칙은 지켜져야 할 것"이라며 "필요할 경우 관련 법 정비를 위한 절차 진행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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