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괜찮아, 나는 문근영이니까"
2015-12-12 13:59:55 2015-12-12 13:59:55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걔는 나보다 더 어른이야. 말하는 걸 봐봐. 한 때 김연아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있었던 '국민 여동생'이야. 우리랑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르다고."
 
곧 환갑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이준익 감독이 영화 '사도' 당시 문근영을 평가해달라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이 말을 꺼냈다. '어른스럽다'가 아니라 '나보다 더 어른'이었다. 이 감독은 문근영이 본인을 더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작품을 먼저 생각하는 연기를 펼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문근영 덕분에 영화 '사도'가 더 깊이있고 높은 수준의 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러한 문근영의 태도는 SBS 드라마 '마을-아치하라의 비밀'('마을')에서도 이어진다. 감정의 높낮이가 큰 캐릭터가 즐비한 '마을'에서 문근영은 거의 유일하게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인 한소윤을 연기했다.
 
스토리상 모든 캐릭터와 부딪혀야 했던 문근영이 중심 축을 잡았고, 다른 배우들은 감정 연기를 몰아쳤다. 이 때문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주인공 같다"는 의견이 나왔다. 등장 캐릭터 모두가 살아숨쉬는 듯한 '마을'은 국내 최고의 장르물이라는 극찬도 받았다. 이런 극찬을 만들어내는데 문근영이 중심에 있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웰메이드 드라마의 중심에 있었던 문근영을 지난 9일 서울 논현동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조심스러워 가급적 인터뷰를 피해왔던 그가 6년 만에 자리를 가진 것이다. "인터뷰가 부담스럽긴 한데, '마을'이 워낙 만족스러워서요. 인터뷰로 작품의 마무리를 짓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약 한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눈 문근영은 예상한 바보다 더 어른이었고, 깊었다. 아역시절을 거쳐 '국민 여동생'이었던 20대를 지나 서른을 앞두고 있는 문근영의 진심을 알아봤다.
 
문근영. 사진/나무액터스
 
◇문근영이 '마을'에 온 까닭
 
'마을'의 스토리를 간추리면 부모를 잃고 캐나다에서 외할머니 손에서만 자란 소윤(문근영 분)이, 우연찮게 아치하라의 마을에 입성하게 되고, 그 곳에서 생사도 모르고 지낸 친언니 소정(장희진 분)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을 파헤친다는 내용이다.
 
소윤이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소정의 죽음을 아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일삼고, 소윤의 시점에서 극이 진행되면서, 무엇이 진실인지 쉽게 알 수 없다. 진실과 관련된 힌트들이 상징적으로 불친절하게 등장하고, 연속되는 사건도 매우 복잡하게 꼬여있다. 전개도 속도감이 있어 '잠깐'을 놓치면 캐릭터의 대사마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 뿐 만 아니라 '출생의 비밀', '성폭행'과 같은 매우 자극적인 소재가 혼잡해 있다.
 
'마을'이 "생각할 것 없이 쉬운 드라마"를 원하는 시청자들을 유입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건 제작전부터 예상된 그림이었다. 그럼에도 문근영은 '마을' 출연을 자처했다. 그리고 최고의 극찬을 이끌어냈다. 
 
"제가 장르물을 좋아해요. 그리고 지상파에서 러브라인도 없고, 사건에만 몰입하게 하는 작품을 한다는 게 신선했어요. 그런 호기심이 있었어요. 이런 작품이 내 필모그래피에 있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어요. 스토리가 정말 좋아서 무조건 하고 싶었죠. 돌이켜 보니 작품 자체가 새로운 시도였고, 도전이었다고 생각해요."
 
'국내 최고의 장르물'로 평가받은 '마을'은 시청률 5~6%에 머물렀다. 주인공으로 나선 문근영에게 있어 만족할만한 수치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문근영은 "기대이상의 성적"이라면서 웃음을 지었다.
 
"너무 복잡하잖아요. 사건도 시간 별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매회 마다 여러 사건이 튀어나오고요. 저는 대본을 보고 사건을 나름대로 정리하기까지 했어요. 몇 번씩 대본을 읽는 저도 이런 상황인데, 영상으로 보는 시청자들은 오죽 어려웠겠어요. 있던 사람들도 나갈 수 있는 드라마인데, 중간에 유입되긴 더 힘들었겠죠. 처음부터 '마을'의 매력에 꽂힌 시청자들이 끝까지 따라와 준 것만으로도 성공적이라 생각해요. 전 2%를 생각했는 걸요."
 
문근영. 사진/나무액터스
 
◇문근영이 '마을'에서 부린 욕심
 
앞서 지난 9월 영화 '사도' 시사회가 끝난 뒤 문근영은 "이 영화는 사도세자라는 인물을 더욱 심층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혜경궁홍씨 입장에서 연기한다기보다는 '사도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를 중점에 두고 연기했다"고 말한 바 있다.
 
국내 최고의 20대 여배우로 꼽히는 그가 혜경궁홍씨를 사도세자의 주변인물 중 하나로 표현했다는 의미다. 그가 왜 다른 배우들로부터 귀감이 되는지는 '사도'에서 보여준 연기에서 드러난다.
 
'사도'에서 문근영은 자신보다 작품을 먼저 생각하고, 캐릭터에 접근했다. 그리고 '마을'에서 역시 그는 자신보다 작품을 먼저 생각했다. 극중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인물을 딱 필요한대로만 표현했다. 억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문근영이 연기한 소윤은 "보여줄 연기가 없었을 정도로 밋밋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사도'와 마찬가지로 작품성을 먼저 봤어요. 내가 맡은 롤에 대해서 크건 작건 개의치 않았어요. 소윤은 극중에서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게 극을 이끌고 중심을 잡는 인물이에요. 여러 사연을 가진 인물을 만나 그들의 진폭이 큰 감정을 경험하는 사람이고요. 그 감정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드라마처럼 캐릭터를 만들고, 캐릭터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건의 진행에 맞춰서 유동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했어요."
 
소윤이 중심을 잡자 모든 캐릭터가 활개를 쳤다. 신은경, 정성모, 온주완, 장소연, 장희진 등 주요배우들은 물론 박은석, 안서현, 우현주, 이열음, 최재웅 등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배역까지 모두 힘이 실렸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중요한 역할을 만드는데 문근영이 있었다. 작품 내에서 딱 주어진대로의 역할만을 수행했다. 문근영 개인의 욕심은 16화 동안 단 한 장면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문근영은 나름의 욕심을 부렸다고 밝혔다.
 
"꼭 인물의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만이 배우의 욕심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소윤에게 주어진 역할은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을 정확히 연결시키고 이끌어나가는데 있었어요. 이걸 잘해내고 싶었어요. 감정 표현이 과하면 안되는데 과하게 하는 건 잘못된 욕심 같아요. 물론 그게 필요할 때는 그렇게 해야겠죠. 그 캐릭터에 주어진 롤이니까요."
 
그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굳이 자부심을 갖자면 전 문근영이니까요. 제가 굳이 더 알아달라고, 저 연기 이렇게 잘한다고 뽐낼 필요는 없지 않나요. 이젠 제가 하고 싶은 연기, 역할을 고르는 게 이전보다 좀 더 쉬울 것 같아요."
 
문근영. 사진/나무액터스
 
◇"나는 문근영이니까"
 
어쩌면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한 배우의 태도를 풀어놓은 발언일수 있다. 하지만 그 당연한 태도를 수행하는 건, 배우도 인간인지라 쉽지 않은 대목이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활약한 연기자들도 자신의 캐릭터에 힘이 실리도록 욕심을 부리는 공간이 카메라 앞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문근영이 보여준 연기와 발언은 더욱 깊고 차원이 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문근영의 이러한 태도를 갖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사도'가 끝나고 갖게 됐어요."
 
'사도'는 문근영이 유일하게 자기 고집을 내세워 출연한 작품이다. 극에서 비중도 작고, 심지어 매력적으로 비춰지지도 않는 혜경궁홍씨를 소속사 사람들을 비롯해 모두가 만류할 때 "꼭 하고 싶다"며 합류한 작품이 '사도'다. 다수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 선택은 많은 고민을 안겨줬다. 그 때 이준익 감독의 조언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사도'를 할 때 배우로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나를 많이 고민했어요. 내가 해왔던 역할을 되짚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넌 문근영이야. 넌 어떤 작품이든 해도돼. 널 의심하지마. 넌 그래도 돼'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저에 대해서 의심을 버려봤어요."
 
'국민 여동생'으로 추앙받고 있을 때도 그는 그를 의심했다. '내가 이런 칭찬을 받아도 되나', '내가 이런 작품에 출연해도 되나', '내가 이런 상을 받아도 되나' 등 스스로를 채찍질했다고 했다.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였다.
 
"이 감독님의 말을 듣고 '정말 그런가'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도'를 봤을 때 정말 작은 역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해서 생긴 시너지 같은 게 보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저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래서 선택할 수 있었던 작품이 '마을'이었다. 유일하게 감정 표출이 적고, 여성으로서 매력적이지 않지만 '잘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이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제가 어릴 때부터 연기를 했잖아요. 꼭 떠야할 필요도 없었고, 단지 연기가 재밌기만 한 순수한 마음이 있을 때 시작했어요. 그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 같아요. 작품이 누구 하나만 잘한다고 되는게 아니잖아요. 저만 재밌다고 되는게 아니고요. 여러 배우들이 호흡이 잘 묻어나고, 그래야 발란스가 맞고, 좋은 작품이 되는 거잖아요. '마을'은 제 몸에 베어있는 게 자연스럽게 나온 거 같아요."
 
문근영. 사진/나무액터스
 
◇"'다작'하는 여배우가 되겠다"
 
'마을'은 문근영에게 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작품이라고 했다. 칭찬은 커녕, '시청률 2%'를 기대한 작품이 6%를 기록했다는 점과 엄청난 극찬을 받았던 부분, 시청률이나 대중의 반응에 연연하지 않고 애초에 가고자 했던 방향을 묵묵히 걸어간 지점 등이 그 이유다.
 
"원래 시청률을 잘 신경쓰지 않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기대 이상이었어요. 그리고 시청률이 잘 나와도 작품이 좋지 않으면 또 보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 거 같아요. 1부부터 16화까지 몰아보면 더 재밌을 거 같아요. '마을'도 성공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떤 작품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부터 문근영은 다작을 꿈꿔왔다. 1년에 영화 2편에 드라마 1편을 꼭 찍고 싶었던 그였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작품에 대한 선택을 못해왔던 터라 작품 수가 많지 않았다. 문근영은 서른을 맞이하는 때부턴 다작을 가능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이제부턴 쉬지 않고 일할 거예요. 다작을 바랐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선택이 늘 두려웠었거든요. 이제는 제가 원하는 작품을 쉽게 선택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런 점에서 '마을'은 서른을 시작하는 작품 같아요. 30대에는 소처럼 일할 겁니다."
 
문근영은 '마을'을 통해 작품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고 했다. 작품을 넓게 이해하려고 해도, 자신의 캐릭터 위주로 작품을 볼 수 밖에 없었었는데, 모든 캐릭터와 부딪히는 소윤 덕에 작품을 넓게 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아울러 각 배우들이 연기하는 스타일도 알게 됐다고 했다.
 
'사도'와 '마을'을 통해 한층 더 성장한 문근영은 현재 차기작을 고르기 위해 고심 중이다. 되도록이면 영화를 선택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에 꼭 넣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어봤다. 
 
"다작을 해서 팬들과 더 자주, 많이 뵙고 싶어요. 국내의 모든 감독님, PD님. 저는 준비가 됐습니다. 저를 생각해주세요." 
 
작품을 먼저 생각하는 문근영의 작품을 자주 보게 되길 기대한다.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