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투기꾼의 놀이터 된 현대페인트…직원이 살렸다
2016-02-26 06:00:00 2016-02-26 06:00:00
현대페인트는 반세기 동안 페인트 생산의 외길을 걸어온 향토기업이다. 20년간 연 15%의 고속성장을 이어왔던 현대페인트는 1989년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되면서 우여곡절을 겪기 시작했다. 페인트 사업보다는 주가부양에 목적이 있는 새주인들을 거치면서 회사는 20년간 그야말로 투기꾼들의 놀이터로 전락한 것이다. 수차례 경영진이 바뀌면서 회사가 피폐해지자 직원들이 발벗고 나섰고, 그 결과 20년간 투쟁의 결실을 눈 앞에 뒀다. 지난 24일 현대페인트에 근무한지 28년차인 고상인 대표가 경영권을 잡으면서 현대페인트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지난 24일 기자가 찾은 현대페인트(011720) 본사 앞마당은 이틀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정문을 봉쇄하며 41일째 강력하게 농성을 이어갔던 이틀 전과 달리 이날은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앞마당에서 모인 조합원들은 장시간 회의를 이어갔다. 회의에 임하는 조합원들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밝았다.
 
현대페인트는 이날 오후 대표집행임원(대표이사)의 신규 선임에 따라 최윤석 대표집행임원에서 고상인 대표집행임원으로 변경됐다고 공시했다. 고상인 대표는 현대페인트 영업 본부장을 역임한 인물로, 관련 산업에 정통한 인물이 경영권을 잡은 것은 창업주 이후 처음이다. 20년간 길고 긴 투쟁 끝에 직원들이 투기자본 손에서 회사를 지켜낸 셈이다. 현대페인트는 투기 목적이 아닌 회사의 미래를 보는 투자자를 찾아, 본업으로 고속성장을 이어갔던 과거 명성을 되찾겠다는 각오다.
 
부도 2번·매각 4번·전 대표 구속까지
 
지난 1989년 회사가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것이 경영 위기의 시발점이 됐다. 당시 경영진은 주식 발행으로 얻은 자금을 각종 투기에 쏟아부으며 외형 불리기에 나섰고, 결국 회사는 1998년 부도를 맞게 됐다.
 
부도 이후 회사는 20여년간 또 한 번의 부도와 네 차례의 매각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대주주가 수차례 바뀌면서 적게는 200억원에서 많게는 800억원까지 총 1600억원 가량의 시세차익을 챙겼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법적인 조치도 이뤄졌다. 지난해 11월에는 최대주주였던 이안 전 현대페인트 대표가 주가 조작 등으로 218억원을 챙긴 혐의로 구속돼 현재 수감 중이다. 전 경영진의 구속으로 회사의 혼란을 더해졌다. 이안 전 대표의 구속 직전인 지난해 10월부터 현재까지 4개월간 대표이사 변경만 7차례다. 
 
시세차익을 노린 매각이 되풀이 되면서 경영 실적도 곤두박질쳤다. 1995년 연매출 510억원을 기록했던 현대페인트는 1998년 부도를 맞을 당시 278억원으로 반토막난 이후 2000년 389억원, 2005년 490억원으로 회복되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본업에 대한 정상적인 투자가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매출이 급감했고, 지난해 연매출은 270억원에 그쳤다. 영업적자도 2007년 이후 9년째 이어오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2007년 이전까지는 3~5%정도인 페인트 업계의 영업이익률을 유지해왔다"며 "2007년 접어들면서 당시 대표가 정상적인 투자를 하지 않았고, 그러면서 영업이익률이 마이너스 10%대가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1년간 최대 3345원이던 현대페인트 주가는 24일 기준 1140원까지 하락했다.
 
5년째 임금동결·1년치 월급 반납…110명 직원이 살렸다
 
망가져가는 회사를 포기하지 않은 건 직원들이었다. 현재 근무 중인 110여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살린 장본인이다. 현대페인트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14년이다. 이들 중에는 20년 이상 근무한 직원은 30명, 30년 이상 근무자도 5명이다.
 
직원들은 기꺼이 회사의 고통을 분담했다. 기업회생 등을 사유로 5년 가까이 임금은 동결 상태가 이어지고 있으며, 직원들은 지금까지 총 3회에 걸쳐 월급도 반납했다. 이 기간동안 반납한 액수는 총 1년치 급여에 해당한다. 1인당 연 50만원 제공됐던 복지혜택도 현재 전무한 상태다.
 
회사의 경영정상화를 기다리던 직원들이 전·현직 경영진과의 전면전에 나선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지난해 11월 최대주주인 이안 전 현대페인트 대표가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이 발단이 됐다. 노조와 임직원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전·현직 경영진을 전면 조사하고, 페인트사업에 전념하는 정상적인 투자자를 유치해달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투쟁 43일째인 지난 24일 이사회를 통해 비상대책위원장인 고상인 상무가 대표로 선임되며 회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고 대표는 "1997년 340명의 직원이 근무했지만 점차 인원이 줄어들면서 현재는 110여명의 직원들이 남아있는 상태"라며 "복지, 임금인상 보다 회사가 다시 살아나길 바라는 직원들의 마음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취재를 위해 세차례에 걸쳐 기자가 만난 고상인 대표는 이날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입사 15년차인 직원은 "지금까지 회사를 살리기 위해 했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지 않고 새로운 기회로 결실을 맺어 기쁘다"며 "앞으로 회사가 해결해가야 할 문제가 많은 만큼 지금처럼 직원들이 힘을 보탤 것"이라고 전했다.
 
새투자자 선정·진천 공장 완공 급선무
 
경영 정상화를 위한 현대페인트의 첫 걸음은 '새 주인 찾기'다. 현재 유력한 후보는 해외매출 연 200억원을 가진 외국계 기업으로, 페인트에 대한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투자자와 차이가 있다. 그 동안 현대페인트의 새주인은 일본에서 면세점 및 화장품업을 영위하는 JTC, 에너지 개발회사인 유아이에너지 등이었다. 그렇다보니 본업인 페인트에 대한 투자에는 소홀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현대페인트의 새 주인으로 유력한 후보인 외국계 기업은 현재 해외시장에 페인트를 공급하고 있으며, 인도시장에 별도의 페인트 관련 사업을 가지고 있다. 현대페인트는 이 기업을 새 주인으로 맞이할 경우 올해 연매출 500억원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투자자 선정은 다음달 2일 이사회를 통해 이뤄질 예정이다.
 
인천시 부평에 위치한 현대페인트 전경. 사진/현대페인트
 
충청북도 진천에 위치한 공장 완공 역시 경영 정상화를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공장이 마련될 진천은 인천시 부평에 위치한 본사의 대체부지다. 진천 공장은 올 4월 완공예정이었지만, 대금 미지급으로 공정률 39% 시점에서 공사가 멈췄다. 본사 부지에 대한 임대료를 절약하기 위해 하루 빨리 공사가 진행돼야하는 상황이다.
 
전 경영진의 횡령·배임 사실이 드러나면서 상장폐지도 불가피하다. 이로써 불거질 주주들의 반발도 떠안아야 한다. 현재 현대페인트는 외부 회계감사 중으로 감사 결과 감사의견 '한정'이나 '거절'이 나올 경우 상장폐지 수순을 밟게 된다. 회사는 지난 2014년 기업회생을 종결한 후 상장폐지 실질 검사를 받은 바 있다. 상장이 유지되면서 100억원 투자 등 5가지 조건을 이행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현재 이행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때문에 상장폐지가 불가피할 것 이란 게 업계의 시각이다.
 
고상인 대표는 "회사를 거쳐간 대표들이 회사를 피폐하게 만들어 놓고 눈에 보이는 횡령까지 일삼았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지금까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던 경영 운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장폐지 등으로 주주들의 반발도 예상되지만 회사의 청산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회사 경영 정상화에 박차를 가해서 다음달 새주인을 맞이할 준비 작업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효정 기자 emyo@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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