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4월은 찬연하고 처연하다. 유채꽃과 진달래가 어김없이 이 땅에 피어나고 4·3과 4·19가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달력의 숫자는 숫자일 뿐이나, 각자의 체험과 기억과 학습에 따라, 그 숫자가 가리키는 날을 마주하는 가슴의 반향은 각각 다를 것이다. 4·19에 비해 4·3은 제주의 지역적 고립성만큼이나 역사 속에서 배제되고 감추어져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었다. 1999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TV에서 4·3사건을 보도하고, 2000년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어 진상규명을 하게 될 때까지 한라산은 50여년 동안 구름 속에서 침묵해야 했다.
깨어나는 4·3의 진실
"1948년 4·3사태가 지나갔다 / 아직 / 공포는 남았다 / 살욕도 남았다 / 적의와 원한 깊은 골짝에 그냥 잠겼다 // 제주도 인구 3분의 1이 없어졌다 / 한라산은 구름 속에 있고 / 저녁 파도는 늘 높았다 // 한라산 중산간 일대 / 수북리 / 갈고개 / 굴말 / 인당리 등 일곱 마을 // 그 마을들 / 할멈이나 헌 아낙들만 살아남았다 / 처녀란 처녀 다 없어졌다 / 서북청년단이 다 망가뜨렸다 / 남은 아낙들에게 / 사내 씨가 말랐다 // 아낙들 의논이 퍼져갔다 / 그 의논만이 새로운 삶 / 20리 저쪽 오름 넘어 / 한 젊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 나이 31세 / 장가 못 간 벙어리 // 그 벙어리 불러다가 / 씨를 받았다 / … / 날마다 / 하루 걸러 / 밤마다 씨를 받아 / 아낙들 아이 뱄다 // 그래서 죽은 남편 성씨의 자식을 낳았다 / 벙어리는 폭삭 늙어 / 나무지팡이 짚고 먼 수평선 눈감고 바라보았다"('제주도 중산간마을', 16권).
제68주년 제주 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지난 3일 4·3 평화공원에서 유족들이 묘비를 정성스레 닦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 말문 막히는 상황을 낳은 제주 4·3의 역사는 무엇일까? '공산폭도들의 반란'으로만 매도되고 군·경에 의한 양민학살은 은폐되었던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4·19혁명과 더불어 시작됐다. 그러나 이 논의는 다음해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이후 1980년대 말 민주화운동이 번성하던 시기에 다시 조명됐다. 90년대 민주화의 분위기 속에서 제주도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부단한 노력을 거쳐 마침내 2000년 1월12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됨으로써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착수됐다. 2003년 10월15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고, 10월31일 대통령은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됐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4·3사건의 배경과 전개
'4·3특별법' 제2조 1항의 정의에 따르면,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돼 있다. 여기서 기점이란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채이자 이에 항의하며 쫓아가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4·3의 배경에는 미군정의 정책과 관리들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미군정이 일제의 식민통치 기구와 부일협력자들을 존속시킴으로써 구(舊)친일경찰을 군정경찰로 기용한 점, 무리한 곡물수집정책을 비롯한 미곡정책의 실패, 군정관리와 모리배의 결탁 등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과 좌익세력의 활동이 있었고, 외부로부터 제주도로 파견되어 들어온 응원경찰대, 서북청년단과 제주도민들 간의 반감이 있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일으킨 것도 이 응원경찰대였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하여 제주도는 3월10일부터 민·관 총파업에 돌입하게 되고, 이후 도민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계속된다. 마침내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의 수호와 단선·단정을 반대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결정하고,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350여명의 무장대로 12개의 경찰지서와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한다. 이후 군·경과 우익단체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진행되고 마을주민들도 무차별적으로 집단 살상된다.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마을 / 2월 4일부터 며칠 동안 / 4백 원혼 제사를 지냈다 // 남자라고는 씨도 없이 / 여자들이 제주가 되었다 / 평소 갈옷 바람 / 몸뻬바지 바람이건만 / 제삿날은 다 흰 치마저고리 입었다 // 하루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 / 울음도 반공법 위반 // 1949년 1월 17일 / 북촌국민학교 마당 / 주민 다 불러온 뒤 죽였다 / 4백여 채 집을 다 불질렀다 / 그런 중에도 살아남은 아낙들 있다 // 아낙들 조마조마했다 / 제사상이 없는 집은 / 방바닥에 메를 차려 / 아무도 몰래 제사 지냈다 / 등불 없었다 / 캄캄한 어둠속 // … // 소리 죽여 / 울음 죽여 울었다 / 살아남은 마누라 / 살아남은 어머니 / 살아남은 누이 / 소리 죽여 / 제사 뒤 / 물만밥 먹었다 // 바다 건너간 / 일본 오오사까 북촌 출신 아낙들도 / 그날밤 제사 지낸다"('무남촌 제사', 18권).
제주 4·3 제 50주년 기념사업추진 범국민위원회에서 발간한 '제주 4·3의 진실규명' 중 5페이지.자료/고은재단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14쪽에는 다음과 같이 보고돼있다. "이날 아침에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 그러자 흥분한 군인들이 북촌리를 불태우고 주민 300여 명을 집단 총살한 것이다. 또한 군인들은 살아남은 주민들 중 함덕리로 소개해 간 북촌리 주민 100여 명을 또다시 총살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 당시 경찰로서 대대장 차량 운전수로 차출됐던 김병석은 놀랄만한 증언을 했다. 김병석은 '이미 집들을 다 불태워 버린 상태에서 그들을 수용할 대책이 없어 죽였으며, 군인 개개인에게 총살의 경험을 주기 위해 박격포 대신 총을 사용했다' 고 증언했다."
이 '북촌사건'의 한 어린 소년이 살아남은 방식을 보자. "제주 북촌 / 사람들 3백20명이 잡혀왔다 // 할머니가 말했다 / 네 아버지도 죽었다 / 너마저 죽으면 대가 끊긴다 / 너는 이 할미 치마 속으로 들어오너라 // 싸이렌이 울렸다 // 일제히 총소리가 났다 / 모두 일어섰다가 / 풀썩 / 풀썩 쓰러졌다 / 비명도 몇 개 없었다 // 부대장은 / 막 제주도에 상륙한 병사들마다 / 사람 죽인 경험이 없어서 / 사람 죽이는 경험을 위해서 / 3대대 전원에게 / 총살작전을 명령했다 // 죽은 할머니의 치마 속에서 / 손자 살아 있었다 // …"('부청하', 19권). 이 여섯 살 소년 부청하는 고아원에서 자라나, 이후 상록원이라는 보육원의 원장이 되고 제주 북촌리 학살 재경유족회장이 되어 '2003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 증언대회'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증언하게 된다.
'잠들지 않는 남도'
처음에 인용된 시 속에 나오는 중산간마을에 대한 주한미군사령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모든 저항을 없애기 위해 모든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유격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 (중략)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 당했다.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45개 마을과 부분적으로 파괴된 43개 마을로부터 피난민들이 해안 마을의 수용소로 이동해왔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 이 '초토화' 작전에 의해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1949년 3월까지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게 된다. 이는 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중산간마을 주민 2만 여명이 오히려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에 결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주 4·3 제50주년 기념사업추진 범국민위원회에서 발행한 '4·3 역사신문'. 자료/고은재단
무장봉기 초기 단계에서 9연대장 김익렬은 무장대 총책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4·28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하지만, 사흘 후인 5월 1일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오라리 방화사건'을 저지르고, 이를 경찰과 미군 CIC(방첩대), G-2(정보참모부)가 오히려 무장대의 방화로 뒤집어씌움으로써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만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197-200쪽). 여기에는 1960년 이승만을 상대로 대선 후보에 나섰다가 미국의 육군병원에서 사망한 조병옥도 한 몫 했다. "그러나 제주도에 건너온 / 군정청 조병옥 경무부장이 / 연대장을 빨갱이와 내통한 빨갱이새끼라고 대들었다 / 연대장이 조병옥의 멱살을 잡았다 / 난투극 / 민정장관 안재홍과 /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이 말렸다 / 딘 소장은 구경하고 있었다 // 다음날 김익렬 연대장은 딘에 의해 해임되었다 // 제주도의 평화가 여기서 깨졌다 / 제주도의 학살이 여기서 시작되었다"('9연대장 김익렬', 20권).
"묵새길 슬픔도 소용없다 // 식민지의 밤 / 궂은비 그칠 줄 몰랐다 / 원혼들이 / 비를 맞고 우세두세 왔다 등불 달아 무엇하랴 // 해방의 밤 / 연사흘 외애밋들 바람 치며 / 저 산등성이 / 원혼들이 울부짖었다 마중 나가 무엇하랴 // 과부집 문풍지에도 넋이 붙었다 // 제주도의 밤 / … // 사변의 밤 / 몇백만의 원혼으로 / 아직껏 / 조국의 남과 북이 / 불러온 독한 세월 / 묻힌 뼈를 들썩여 잠들지 못한다 // 산 자들의 모든 아침과 대낮들마저 / 잠들지 못하는 밤의 나머지 // 모든 씻김굿 따위 오로지 산 자들의 것 / 빨갱이로 반동으로 죽은 자의 것이 아니라"('원혼', 17권).
어린 시절 우리가 제주도는 바람, 돌,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 불린다고 배울 때, 제주에 남자들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고기잡이 나간 바다에서 조난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제 때 징용을 끌려갔기 때문이고 4·3 때 학살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배워야 하지 않을까. 제주도의 많디 많은 세찬 바람은 고은 시인이 말하듯이 원혼들의 묻힌 뼈가 잠들지 못하고 들썩이기 때문이 아닐까.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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