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성원기자] 매년 가을, 국회는 북새통을 이룬다. 업무지원을 위해 투입된 공무원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곳곳에 쌓인 백과사전 두께의 보고자료는 발길에 툭툭 채인다.
올해 국감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여러가지 이슈가 있지만, 금융권 현안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정무위 국감에 주목해야 한다.
정무위 국감의 핵심키워드는 단연 '황영기'다. 황영기 전 KB금융 회장이 국감 증인으로 사실상 채택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동안 일단락되는 듯했던 우리은행 투자손실 책임공방에 다시 불이 붙을 공산이 커졌다.
정무위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예금보험공사 등 '황영기 사태'와 관련된 기관을 담당하고 있다.
◇ 황영기 '강성론' vs. '신중론' 팽팽
금융당국과 예금보험공사에 대한 국감의 향방을 좌우할 '키'는 황 전 회장이 갖고 있다.
금융권과 정치권은 이미 황 전 회장이 증인으로 채택될 것으로 예상해왔다. 황 전 회장 역시 국감 출석 가능성을 내비쳤다.
황 전 회장은 지난 29일 열린 KB금융 출범 1주년 기념식을 겸해 열린 이임식에서 "우리은행 관련 임직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우리 금융시장의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고자 하는 뜻에서 저 나름대로 '소명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감 출석이 ‘소명 노력’을 위한 좋은 기회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증인채택을 염두에 두고 이 같은 발언을 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그가 이미 국감 출석에 대비해 준비작업에 착수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황 전 회장의 별명은 '검투사'다. 승부근성이 강하고, 할 말은 하는 성격으로 알려져있다. 우리은행장 재직 시절 대주주인 예보의 방침에 대립각을 세우며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동안 입을 굳게 닫아온 황 전 회장이 이번 국감에서 '말'을 쏟아낼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의외로 신중한 행보를 보일 것이라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금융당국의 이번 징계에 따라 황 전 회장은 향후 4년간 금융회사의 임원으로 취업할 수 없다. 하지만 2013년이 되면 그는 금융권으로 복귀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은 이보다 앞선 2013년 2월 물러난다. 금융기관 수장(首長) 자리가 정권의 등장과 퇴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는 인사들은, 그가 '화려한 복귀'를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라 말한다. 원론적인 발언만 할 것이란 얘기다.
특히 금융당국의 징계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거나, 우리은행장에 재직할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을 지냈던 윤증현 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이름까지 들먹일 경우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의 강'을 건너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 금융당국·예보 '바쁘다 바빠'
금융당국과 예보는 의원들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국감 준비에 한창이다. 정무위 의원들이 황 전 회장의 입장에서 질문을 할 것으로 보고 대응논리를 점검하는 한편, 관련 자료를 챙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미 예전부터 파생상품 거래내역을 지속적으로 점검해왔다는 입장을 거듭 밝힐 계획이다. '손실이 발생할 때만 관련 절차가 잘못된 것을 지적하느냐'는 비판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논리를 세워놨다.
조영제 금감원 일반은행서비스국장은 "투자손실 규모는 (징계를 결정하는 데) 절대적인 부분은 아니지만 분명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며 "파생상품에 투자한 결과 손실이 났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역추적'했고, 투자결정 과정에서 황 전 회장의 잘못이 확인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상시적으로 건전성 감독을 하는 입장에서 문제가 아직 표면화되지 않았는데 이를 미리 들여다보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과거에 점검했을 때는 투자손실이 평가손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상세하게 따져볼 상황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말 금융당국에 이어 황 전 회장에 대해 중징계를 결정한 예보 역시 대응논리를 갖춘 상태다. 예보는 대주주가 구체적인 투자내역 등을 일일이 점검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구체적인 영업활동이나 투자내역을 일일이 보는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발생한 손익이 예보와 맺은 경영이행약정 (MOU) 목표치에 반영된 결과를 점검했고, 여기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다.
예보 관계자는 "일각에서는 징계가 너무 늦었다며 '눈치보기'라는 얘기가 있지만, 사장이 새로 부임하며 업무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을 설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승우 예보 사장은 9일로 예정된 예보 국감에 출석하기 위해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IBRD) 총회 참석도 포기한 상태다.
◇ 황영기 발언 최대변수
일단 금융당국과 예보 관계자들은 국감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황 전 회장이나 의원들이 어떤 말을 하든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원실 쪽에서 요구한 자료목록을 살펴보면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는 점도 피감기관의 대응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국감장에서 의원들이 금융당국과 예보의 문제를 명쾌하게 지적하기는 쉽지 않다.
오랫동안 실무를 맡아온 담당자들의 전문성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데다 여러가지 시간상 제약으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질의를 마친 뒤 곧장 자리를 뜨는 의원들도 허다하다.
지난해 국감에서 키코의 상품구조를 철저히 해부했던 한나라당 고승덕 의원도 이번에는 황영기 사태와 관련해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 당시 그는 각종 시청각자료를 통해 키코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현재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과 민주당 신학용 등 정무위 의원들이 금융당국와 예보에 대한 질의에 나설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얼마나 명쾌한 논리로 금융당국 책임론을 제기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일부 의원들이 자극적인 질문에 몰두하는 관행도 이같은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대중의 관심을 원하는 의원들은 이른바 '국감스타'로 뜨려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정무위 국감에서는 국내 정유사들의 독과점 문제를 지적하는 민주당 A의원이 공정거래위원회 담당 국장을 세워놓고 생수병에 담긴 석유를 내보이며 "이것은 국민의 피"라며 뜬금 없이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정유사의 가격결정 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은 찾기 힘들었다. '보여주기식' 질의의 전형적인 사례다.
결국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할 때, 의원들이 금융당국과 예보에 시스템 개선안을 마련해 향후 보고할 것을 요구하는 선에서 논란이 일단락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황 전 회장의 발언은 여전히 최대변수로 남아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서로의 입장을 듣고 개선책을 요구할 뿐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그래도 시스템 개선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국감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예보에 대한 국감은 오는 9일, 금융위와 금감원 국감은 각각 12일과 13~14일에 열릴 예정이다.
뉴스토마토 박성원 기자 want@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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