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9월. 여름방학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9월의 첫날이 목요일인 터라 그나마 위안을 삼으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안 단톡방은 개강을 믿고 싶지 않은 대학생들의 신세 한탄으로 시끄러웠다. 다른 학교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월요일부터 개강인 학교도 있었다. ‘나는 그나마 나은 편이네.’ 친구들에게 고작 3일 늦은 개강을 자랑하며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A.M 10:47.
첫 수업이 12시라 출근 시간대를 피했다. 나름 한적한 지하철이지만 출입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등굣길엔 크러쉬 노래가 제격이지’라는 생각에 이어폰을 꽂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더워 하늘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데 어느새 제법 가을 하늘의 모양새다. 바깥구경도 잠시, 지하철은 어두운 지하로 들어섰다. 노래를 들으며 창문에 비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내 얼굴 뒤편에 비친 사람들에게 눈길이 갔다. 당연히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을 거란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은 한 곳에 집중돼 있었다.
고개만 살짝 돌려 시선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4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무언가 불편한 듯 식은땀을 흘리며 목 주변을 잡고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도와주어야 하나’하는 생각에 이어폰을 빼고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지하철은 너무도 조용했다. 흔히 할 수 있는 “어디 불편하세요?” “도와드릴까요?”라는 말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여성에게 다가갔다. 여성에게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서 나로 옮겨졌다. 어디 불편한 곳 있냐는 나의 물음에 여성은 숨쉬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다행히 119에 연락할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 쉬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여성의 말에 그를 부축해 비어있는 자리로 데려갔다. 자리로 이동하는 순간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람들이 건넨 건 우리를 애써 외면하고픈 마음이 담긴 시선뿐이었다.
사진/kbs2 캡쳐
지하철에서 쪼그려 앉아 고통을 호소해도, 택시기사가 심정지로 사망해도 사람들은 그저 시선을 던질 뿐이다. 학교폭력이나 가정폭력도 예외일 순 없다. 시선뿐인 사회에서 나도 모르게 방관자가 되는 경우는 흔하다. ‘누군가는 도와주겠지’라는 생각이 모여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상황을 우린 일상 속에서 빈번히 마주하고 있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성경』 누가복음 10장 30~37절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 거창하고 물질적인 도움이 아닌 괜찮냐는 물음 하나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 성경 속 착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을 도와주었고, 이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의 시초가 되었다. ‘택시기사 심정지 사건’으로 우리나라에도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오늘 지하철에서 만난 여성은 유대인도, 앙숙 관계인 사람도 아닌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최소한의 도덕성도 법으로 강요해야 하는 사회. 그런 사회 속에서 나는 또 누군가에게 ‘방관자’가 되진 않았을까 두려워진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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