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가다 놈들, 멀쩡한 화장실 놔두고 왜 오줌을 바닥에다 갈겨대는지.”
건설현장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하던 지인에게는 ‘바닥에 오줌을 갈겨대는’ 노가다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그는 노가다의 근성을 탓했다. 그에게 노가다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귀찮아 아무데서나 ‘오줌을 갈기는’ 게으른 사람이었다. 나 또한 그들은 원래 그런 줄 알았다. 일하다 말고 현장 한편에서 술판을 벌이는 게 진정 노가다다운 모습이라 여겼다.
그러나 우연히 전해들은 현장의 상황은 적잖은 충격을 가져다줬다. 못해도 20명 이상이 근무하는 현장에 화장실은 단 두 칸뿐이었던 것이다. 그마저도 본격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숨 돌릴 틈 없이 작업에 투입되어야 하는 노가다에게는 화장실에 가 볼일을 보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그들에게 공중도덕이 부재한 것은 아니었다. 현장의 상황이 공중도덕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다.
5월 28일, 구의역 9-4 승강장, 갓 사회로 나온 19살 청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장 난 스크린도어를 손보는 중이었다. 회사동료로부터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구의역이 마무리되면 곧장 을지로4가역의 스크린도어까지 정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일감은 쌓여있는데 야속하게도 시간은 6시를 향해 갔다. 청년의 손이 분주해졌다. 5시 57분, 열차가 들이닥쳤고 바삐 움직이던 청년은 스크린도어와 열차 사이에 낀 채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순식간이었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청년의 생이 끝나버렸다.
어린 노동자의 죽음에 사회는 분노했다. 청년의 어머니는 “우리 아이가 온몸이 부서져 피투성이로 안치실에 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통곡했다. 모두가 무엇이 이 안타까운 죽음을 불러왔는지 고민하던 그 때, 서울메트로에서 사고의 원인을 들고 나왔다. 믿을 수 없게도 그들이 말하는 사고의 원인은 매뉴얼을 지키지 않은 청년이었다. ‘2인 1조 규칙’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작업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청년은 서울메트로의 하청업체, 은성PSD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은성PSD에서는 서울메트로의 퇴직자들이 대거 직원으로 이름을 올려두고 매달 422만원을 챙겼고 이들 중 다수는 스크린도어 기술 보유자도 아니었다. 전체 직원의 30%가 이와 같은 유령직원이니 모든 업무는 나머지 70%에게로 고스란히 돌아갔다. 실질적인 수리 작업은 청년과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도맡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더군다나 하청의 특성상, 원청업체로부터 최저가 입찰로 업무를 따냈기 때문에 최소의 인원으로 최대한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업계에서는 당연지사였다.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달아 49개의 역사를 단 6명의 직원이 담당해야 했고 여기서 ‘2인 1조 규칙’은 애초에 지킬 수 없는 허울뿐인 매뉴얼에 불과했다.
“그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가 아닙니다.” 사진/김민제
청년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공분이 채 일기도 전, 또 다른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죽어나갔다. 경기도 남양주의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붕괴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고로 현장에 있던 노동자 중 4명이 사망했고 10명이 다쳤다. 그리고 사상자 14명 전원은 포스코 건설의 하청업체인 매일ENC의 직원이었다. 정규직은 물론 아니었고 각자 일용직 개념으로 계약을 맺은 상태였으니 일용직 노동자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사고 현장에서는 환풍기도, 화재경보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작업 전 이루어져야 하는 안전작업 허가서 작성도 생략됐다. 최소한의 안전도 갖춰지지 않은 위태로운 현장에서 사상자 14명을 포함한 17명의 노동자는 목숨을 걸고 일했다. 그러나 원청인 포스코건설도, 하청인 매일ENC도 일개 일용직 노동자의 죽음에는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작업 현장에 만연해있는 ‘안전불감증’을 지적했다. 노동자들이 안전에 둔감해 안전 규칙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이와 같은 사고를 불러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안전할 겨를이 없었다. 누구보다 해고에 쉽게 노출돼 있었기에 안전하게 만들어 달라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그저 눈앞에 닥친 일을 빠르게 해치워야 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2인 1조 작업규칙’을 지키는 것도, 죽을 걱정 없이 일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고용 유연화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사회에서 노동자의 목숨은 언제나 위태롭다.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직원이고 일용직이고 파견직인 그들에게는 몸담고 있다할만한 소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의 죽음에 책임을 나눌 ‘그들의’ 회사가 어디에도 없다는 소리다. 까딱하면 목숨을 잃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노동자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죽으면 자기목숨 하나 지키지 못한 탓이 되어버린다. 물론 안전 매뉴얼은 있다. 노동자를 위해 마련되었다고는 하나 노동자는 그 매뉴얼을 지킬 수 없다. 오히려 사측이 이를 적극 활용한다. ‘충분한 안전 규칙을 세워 두었으나 이를 준수하지 않아 사고가 발생했다’는 명분을 만들어주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이니 말이다.
고용노동부와 국민안전처의 조사에 따르면 하루 1.2명꼴로 건설현장에서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이들 중 다수가 불안한 고용 상태에 놓여있다. 하나같이 이 점을 적극 활용해 수도 없는 노동자의 죽음을 외면하기 바쁘다. 별 수 없이, 위험한 작업현장에서 살아남는 것은 오롯이 노동자의 몫이 된다. 그들을 위한 안전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방심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그 곳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헐거워진 안전모를 조이는 것뿐이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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