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 어지러운 공사현장에서 땀 흘리는 노동자의 생동감 있는 표정이 담긴 사진을 본 적이 있다면, 이미 한 번 쯤 그의 작품을 만났을 수도 있다. '커머셜 포토그래퍼'로 30년 가까이 현장을 누비며 여전히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선우형준(50·사진)씨의 작품에는 우리나라 산업현장의 역사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삼성, LG 등 국내 굴지의 기업들과 작업하며 이들이 고객에게 내미는 '첫 얼굴'을 책임져왔다. 이제는 '척하면 척'하고 작품을 찍어낼 것 같지만, 그는 아직도 현장이 어렵다고 말한다.
전 세계 누비며 산업현장 기록…"위험 즐기는 건 성격"
5년여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 북쪽 모하비 사막에서 기아차 '모하비' 주행씬을 찍으면서 그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차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담기 위해 모하비를 따라 시속 40~50km로 달리는 봉고차에 올라 상반신을 문 밖으로 내밀고 엎드려 촬영하던 중이었다. 그의 허리를 붙잡아 주던 스텝이 잠시 놓은 손을 놓은 사이, 차가 코너링을 한 것이다.
"몸이 밖으로 완전히 딸려나갈 뻔 했죠. 위험하긴 하지만 낮은 앵글에서 달리는 차를 찍으려면 그 방법 밖에 없어요. 알라배마에 있는 현대차 공장에서 촬영을 할 당시엔 저도 모르게 개인 사유지에 들어갔다가 엽총으로 위협을 당하기도 했어요. 그때는 젊기도 했고… 위험한 촬영을 즐기는 건 성격이기도 해요. 아슬아슬하게 촬영하면 끝난 후에 '오늘 재밌었다'는 느낌이 든달까."
가장 힘들었던 출장은 현대차의 사사(社史) '쇳물에서 자동차까지' 프로젝트였다. 50여일 동안 미국을 비롯해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중국 등 전 세계에 있는 현대차 계열사의 공장을 모두 방문해 카메라에 담았다. 햄버거를 끼니로 때우며 '먹고, 찍고, 이동하고'를 반복했다. 한 호텔에 오래 머물 틈이없어 그렇게 많은 속옷과 양말을 사보긴 처음이었다.
보안이 엄격한 연구소에 들어갈 땐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틈새를 잘 파고 들어야 한다. "자동차연구소 내부를 촬영할 땐 한 컷에 바닥과 천장이 동시에 나오면 안 돼요. 그럼 차 크기가 가늠되고, 공장 전체 규모도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라인에서 자동차가 조립되는 순간을 볼 때가 있는데, 특히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신제품일 경우 보안각서가 무시무시하죠. 작업할 때 항상 외장하드를 컴퓨터에서 뽑아 놓는 건 기본이에요."
촬영이 안 풀릴 때 그는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간다. "남양연구소에서 버스, 승용차들을 일렬로 세우고 테스트 드라이브를 하는 씬을 찍는데, 반영(反映)을 더 잘 찍으려면 바닥에 아예 붙어야 했어요. 그날 비가와서 온 몸이 푹 젖었죠. 촬영이 잘 안풀릴 땐 각도를 바꾸면 꼭 한 컷은 건지더라고요. KCC의 도로건설 현장을 찍을 땐 한 여름 대구였는데, 아지랑이를 찍으려고 반팔 입고 엎드렸다가 화상을 입기도 했어요."
중국 염성에서 촬영한 기아자동차 스포티지. 사진/선우형준
단순할 것 같은 석유화학제품 접사를 찍을 때도 보통 수일 간 밤샘 작업을 진행한다. '베테랑'인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접사 주인공은 바로 '알갱이'. LG화학이 생산하는 ABS(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스티렌), SAP(고흡수성) 등은 자잘한 알갱이로 돼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가루 먼지가 발생한다.
"체에 걸러 놓아도 서로 부딪힐 때 마다 계속 가루가 생기는 데, 날아갈까봐 스프레이로 불 수도 없어요. 에어콘이나 온풍기도 다 끄고 최대한 움직임을 줄여 세팅한 뒤 후반 작업에서 200~300배 확대해 먼지를 하나, 하나 지워요. 한 컷에 있는 먼지 수 천 개를 지우는 데만 한 두 시간 정도, 눈알이 빠질 것 같은 순간이 와요. 그래서 단가가 높죠(웃음)." 필름 소재 역시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바닥에 눕혀 찍으면 빛이 투과되지 않아 색깔이 밋밋해지고, 세워서 찍어야 하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뒤로 넘어가 버려요. 필름은 정전기도 많아서 역시 먼지 지우는 게 고됩니다."
ABS(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 이미지. 사진/LG화학
소박한 CEO 양복에 놀라기도…콧수염 수정 작업에 '진땀'
기업인들의 프로필 사진 작업도 맡고 있는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기업인은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이다. "재작년 10월쯤 중국 연변의 백산수 신공장 준공을 앞두고 회장과 아들 부회장을 찍을 일이 있었어요. 보통 CEO들은 외모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오시는데, 그분들은 양복이나 가방이 반질반질하고 오래돼 보이더라구요. 그동안 봐온 CEO들과 다른 소박한 모습에 깜짝 놀랐죠."
CEO의 콧수염 때문에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겪었다. "중동 국가의 왕자인 CEO 프로필을 찍으러 갔는데 직원들의 일사분란한 모습에 놀랐어요. 사무실의 음료수병이나 휴지 같은 걸 치우고 쇼파 위치도 잠깐 바꾸는데, 비서들이 바꾸기 전의 배치를 일일이 디카로 찍더라구요. 나중에 모든 물건을 딱 그 자리에 그대로 돌려놓아야 한다고요. 그 CEO의 콧수염 농도 때문에 회사 쪽과 여러번 오가며 수정 작업을 하기도 했어요. 콧수염이 너무 옅어도, 너무 짙어도 안된다나."
선우씨는 스물 다섯에 월간지 '행복이 가득한 집'에 입사해 사진기자로 첫 걸음을 뗐다. 이후 월간 여성교양지 '여원', 경향신문 출판문화부에서 사진기자 등을 거쳐 지금은 개인 스튜디오 '플루토(Pluto)'를 운영 중이다. 1990년대 잡지·출판사 사진부가 외주화되는 과정부터, 필름 시대 저물고 디지털 카메라로 완전히 전환되는 사진업계 변화에 바삐 몸을 맞췄다. 그가 졸업한 중앙대 사진학과의 86학번의 동기 78명 중 아직까지 관련 활동을 하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힌다.
디카가 대중화되면서 등장한 '블로거'로 인한 위기감도 없지 않다. "확실히 요리 쪽 작업은 많이 줄었어요.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수다 떨면서 작업하는 걸 좋아해서 개인적으론 좀 아쉽죠. 초반엔 질이 좀 떨어지기도 했는데, 날이 갈수록 좋아져서 잘하는 분들은 전문가 수준이더라고요. 오히려 도움을 받을 때도 있죠. 현대로템의 KTX 사진을 찍을 때였나. 특정 지역을 지나가는 열차를 찍어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그럴땐 블로그를 찾아보고 포인트를 많이 참고해요. 아마추어 작가들은 풍경에 강해서 해가 어디로 떨어지는 지, 철로가 제일 잘 보이는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더라구요."
쉰까지 쉼 없이 활동해 온 그는 여전히 카메라를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40대가 되면 우리 업계선 '원로'라고 해요. 주변에서 너무 오래 하는 거 아니냐고 놀리더라구요. 미국에선 모터쇼를 찍는 작가가 휠체어를 타고 다닌대요. 그 정도 나이는 돼야 '너 좀 찍었구나' 하는거죠(웃음). 재밌어서 시작한 일인데, 언젠가부터 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목표로 일하니 우울해지더라구요. 쉰 다섯이 되면 유럽이나 동남아시아를 떠돌며 자유롭게 찍고, 전시회 작품 준비도 하려고요. 처음으로 누군가의 돈을 안받고 내가 찍고 싶은 것만 마음 껏 찍는 거죠. 아이들도 다 컸고, 다행히 와이프도 허락해줬어요."
조승희 기자 beyond@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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