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준형 기자] 국내 기업들이 발행한 전환사채(CB)의 전환가액조정(리픽싱)이 늘어나면서 소액 투자자들의 주주가치 희석과 오버행(잠재적 매도물량)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리픽싱은 CB 발행 기업의 주가가 낮아질 경우 CB의 주식 전환 가격을 낮추는 계약이다. CB 투자자의 경우 전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주식 수가 늘어나지만, 기존 투자자의 경우 보유한 지분 가치가 희석될 수 있다.
14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전일까지 국내 48개 코스닥 상장사가 총 183회의 CB 리픽싱을 진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주식 병합이나 감자에 따른 전환가액 상향을 제외한 전환가액 하향 기업 수는 총 35곳으로 이들이 CB 전환가액을 낮춘 횟수는 167회에 달한다.
대부분의 국내 CB의 경우 전환가액을 조정할 수 있는 리픽싱 약정이 부여된다. 현행 CB 규정상 리픽싱 횟수에 제한이 없어 주가가 급락할 경우 리픽싱 약정에 따라 1~3개월 단위로 리픽싱이 수차례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리픽싱이 늘어날 경우 신규 상장 하는 주식 수가 증가해 오버행 이슈와 함께 기존 주주들의 주식 가치가 감소하는 악영향이 나타난다.
KH E&T의 경우 5~11회차 CB에 대해 22회 리픽싱을 진행했다. 5회차 CB 최초 발행 당시 3500원 선에 거래되던 주가는 지난달 초 1500원선까지 떨어졌고, 현재는 2500원선에 거래되고 있다. 거듭된 리픽싱에 CB 전환가액은 1700원선까지 떨어졌으며, 최초 발행 당시 전체 주식 수의 41% 수준이던 전환 가능 주식 수는 현재 65%까지 늘었다.
에이티세미콘은 올해 10~16회차 CB에 대한 리픽싱을 총 22회 진행했으며, 이 중 10대 1 주식 병합에 따른 전환가액 상향 4건을 제외한 18회의 전환가액 하락이 이뤄졌다. 에이티세미콘의 총 발행 주식 수 대비 전환 가능 CB 물량은 기존 65% 수준에서 100% 이상으로 늘어났다. 자사주 소각 없이 CB 전환이 완료될 경우 기존 주주들의 주식 지분 가치가 절반 이하로 희석되는 셈이다.
특히 리픽싱이 잦았던 기업일수록 만기 이전에 CB를 매수할 수 있는 콜옵션을 부여하거나, CB 배정자가 최대주주나 계열사 등 관계사인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리픽싱이 최대주주의 지분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현행 CB 규정상 주가에 따라 전환가액이 하락한 이후 주가가 다시 반등하더라도 전환가액은 상향 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CB 리픽싱으로 주식 전환 가액이 낮아지더라도 CB 규모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리픽싱이 진행될 때마다 주식 전환 시 확보할 수 있는 주식이 늘어나게 된다”며 “이 때문에 CB가 최대주주 지분 확대에 사용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할 경우 기존 주식 가치도 희석되는 만큼, CB 발행은 기존 주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여의도 증권가 전경, 사진/뉴시스
박준형 기자 dodwo90@etomato.com